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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적대는 조선민국, 서비스업 융합 체질 개선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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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11면

[뉴시스]

“위대한 조선민국(造船民國)은 어디로 갔을까.”


짐 콜린스의 베스트셀러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는 60개 주요 기업을 분석해 위대한 기업이 몰락하는 다섯 단계를 도출했다. 자만심, 욕심, 위기의 부정, 구원 모색, 몰락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우리나라의 위대한 조선 기업은 이 중 어느 단계일까. 민계식(74) 현대학원 이사장 겸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연구교수는 4단계(구원 모색)라고 말한다. 일본을 누르고 세계 1위에 오르자 자만심에 빠졌고, 무리하게 해양 플랜트 산업에 욕심을 냈다가 위기에 빠졌으며, 이를 부정하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진단이다.


실제로 한국 조선 산업은 이미 중국에 4년째 1위 자리를 내줬으며,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빅3’의 지난해 적자 규모는 8조원에 달한다. 2001년부터 10년간 현대중공업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키며 연평균 27.4% 성장의 신화를 일군 민계식 이사장. 그는 지금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대전 KAIST 유레카관 집무실에서 만난 민 이사장은 기업가 정신의 재무장과 조선 산업의 체질 개선을 답으로 제시했다.

-한국 조선 산업 상황이 악화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해양 플랜트 사업의 부실이지만 근본적으로 ‘현대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 정신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표현하는 단어다. 조선업이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이후 안일해졌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억제하는 분위기다.”


-현대 정신의 사례를 꼽는다면. ?정 명예회장이 시베리아 자원을 개발하려고 할 때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시베리아에 가려면 일주일이 걸렸다. 일본 도쿄에 가서 주 1회 운항하는 비행기를 타고 일단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가야 했다. 정 명예회장은 시베리아 자원 개발을 위해서는 울산에서 시베리아까지 8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고속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중공업 특선사업부가 두 달 동안 전 세계를 뒤져 고속선 설계를 모색했다. 하지만 당시로선 전 세계적으로도 설계 능력이 부족했나 보다.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 정 명예회장은 우리가 직접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 지원이 뒤따랐다. 해외에서만 가능한 수많은 성능 시험 지원은 물론 항로 개척을 위한 전용선도 내줬다. 아직도 정 명예회장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가능케 하면서 ‘어이, 머리 하얀 학자 양반,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라고 묻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이렇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정신이 부족하다.”


-기업가 정신이 부족해 조선업계가 기회를 놓쳤다는 건가. “그렇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할 때 한국철도차량주식회사(현 현대로템)라는 회사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현대정공·대우중공업·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사업 부문이 현물출자해 설립된 회사다. 160억원짜리 매물이었는데 한때 80억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 사내에서 적극적으로 인수를 주장했지만 내부 반대를 넘지 못했다. 12년 적자 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과거의 적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수 후 시너지가 중요한데 조선사는 이를 보는 눈이 없었다. 조선 기술을 접목했으면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걸쳐 유럽까지 가는 철도를 개발할 수 있다.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공업용 시스템LSI 반도체와 센서 개발 기술은 하이닉스만 갖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매출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LG전자는 관련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해당 칩을 개발하지 않았다. 이를 조선 기술과 접목했다면 지금쯤 해양플랜트 부실로 인한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했을 수 있다. 실제로 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5조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수뇌부의 정책 미스라는 뜻인가. “부정하기 어렵다. 하이닉스를 인수하려고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와 로봇산업협회 인맥을 총동원해 5년 동안 물밑 작업을 진행했다. SK가 인수한 가격의 절반가량인 2조원 이하로 인수할 기회가 찾아왔지만 당시 공동 대표이사였던 최길선 회장과 이재성 당시 사장이 반대했다. 이들은 서울대 프라이드가 너무 강해 다른 사람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재무 전문가로 조선업 실무를 몰랐다. 조선사 CEO는 법대·상대 전공자보다 공대 전공자가 필요하다. 회사가 어렵다고 연구개발(R&D) 인력을 대규모 구조조정한 것도 큰 판단 미스다. 핵심 R&D 인력을 다 내보내고 어떻게 회사가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 조선업도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본인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중국은 국가적으로 조선업을 준비했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현대중공업을 찾아온 게 무려 5번이다. 장쩌민 전 주석, 리커창 총리도 현대중공업을 방문했다. 중국 상하이교통대에서 전기학을 전공한 장쩌민 전 주석의 예리한 질문은 현대중공업 임원진이 답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구체적인 답변이 가능한 내게 장쩌민 전 주석을 직접 수행하라고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 조선업계에 대한 중국의 정보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우리나라 조선사 고위 임원이 언제 명예퇴직 당하는지 임원 본인보다 먼저 파악해 스카우트를 제의할 정도다. 내게도 현대중공업 회장 연봉의 세 배 이상을 제시한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온다면. “몇 차례 더 연락이 왔는데 내게 스카우트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했다. 사람은 끝을 잘 맺어야 한다. 명색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의 CEO를 거쳤다는 사람이 돈 몇 푼에 중국으로 가는 건 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한국 기업이 스카우트 제안하면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CEO의 도덕적 책임을 고려하면 당장 경쟁사로는 갈 수 없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스카우트 제의가 오더라도 공동 대표이사 체제에서는 일하기 힘들다. 조선 산업은 모든 분야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부 부문만 맡으면 신기술을 개발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다만 과학자로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기술이 사장되는 게 아깝기 때문에 퇴임 10년이 지나면 (경쟁사 이직도) 고려해 보겠다.”


-조선업 위기 극복 방안은. “조선업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조선업은 제조업이었다. 조선업을 서비스업과 제조업을 융합한 산업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조선업에 전기전자제어공학이나 자동화제어 기술을 접목하면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융합할 수 있다. 선박을 건조하고 인도하는 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이미 판매한 배의 고장 징조를 미리 파악해 배를 수리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는 식이다. 배에는 수없이 많은 기계가 들어간다. 사용료를 받고 배를 수리해준다면 선박 인도 이후에도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CEO를 2년만 더 해서 서비스업 융합을 추진하고 나왔으면 지금처럼 현대중공업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는 후회도 있다.”


-당장 주요 조선업체의 CEO로 선임되는 기회가 온다면 무엇을 추진할 것인가. “KAIST에서 연구 중인 선박 연료비 절감 방안이 상당 부분 진척됐다. 컨테이너선 유지 운영비의 80% 이상이 연료비라는 점을 감안하면 연료비 효율을 높일 경우 수년 후 배 하나 살 돈을 뽑는다. 이런 기술이 상용화하면 신시장이 창출될 것이다. 연료비가 15%만 절약되는 배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기존 배는 연료비 감당이 안 돼 모든 배를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한다. 조선사 입장에서는 거대한 시장이 창출되는 셈이다. 이렇게 세계와 경쟁해 이길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진할 생각이다.”


-조선업 위기 극복 위한 정부 역할은. “그냥 가만 놔두면 된다. 시장 자율에 맡기라는 의미다. 과거 정부는 잘하고 있는 조선 산업과 섬유 산업에 갑자기 ‘사양 산업’이란 낙인을 찍어서 힘들게 했다. 조선업이 세계 1위에 오르자 이번엔 ‘굴뚝 산업’이라며 환경을 해치는 것처럼 표현했다.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이명박 정부에서 국가 신성장 동력 선정을 위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정보기술(IT)·나노기술(NT)·바이오기술(BT) 산업이 아니면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 조선업이 어렵다고 정부가 지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이 잘 못해서 부실해진 건 무너지게 둬야 한다. 좀비기업은 퇴출되는 게 건전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다. 억지로 ‘구조조정 기업’ 낙인을 찍지 않더라도 알아서 무너진다.”


-현대학원 이사장으로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세 가지 인생관을 강조한다. 첫째, 만인평등이다. 조선이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다가 인재를 등용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둘째, 범인사상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내게 너 정도 똑똑한 사람들은 세상에 널렸으니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셋째, 자주정신이다. 남의 힘으로 뭘 할 생각하지 말고 본인의 손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가끔 학생들을 만나면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해 준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조언을 남긴다면. “우리나라 국민성은 장점이 많다. 부지런하고 악착같이 일하고 정이 많다. 다만 딱 세 가지가 문제다. 이것만 고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민족이 될 거다. 첫째,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려 들지 않는다. 둘째, 공정한 경쟁(fair play)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아무리 경쟁자라도 무조건 발목 잡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대국적인 태도가 부족하다. 작은 문제로 목숨 걸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 원대한 목표를 이루려면 작은 부분은 희생하거나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대전=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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