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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놈 하나 덤으로” “난 뭐 먹고살라고”…유쾌한 실랑이, 웃음보 터진 설 장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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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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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앞두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던 지난 3일 오전.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시장의 생선가게에서 한 상인이 생선을 보기 좋게 진열하자 손님이 가격을 묻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배는 원래 4개쓱 담아서 만원인디, 하나 더 줄랑게 언능 갖고 가부러~.”(상인)

명절 앞둔 강진 마량시장
고향 찾을 자녀 먹이려
쌈짓돈 아낌없이 풀어
“오메, 이것이 누구당가”
주민들 사랑방 역할까지
중국산 참돔, 미국산 자몽…
외국 농수산물도 많이 팔려

“오메, 사과도 사고 배도 샀는디, 뭣이라도 한나 더 줘야제. 그냥 가라고라?”(손님)

지난 3일 오전 8시쯤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시장. 설 차례 상에 올릴 과일을 사러 온 김양순(77·여)씨가 배 가격을 묻자 상인 윤영초(71·여)씨가 답변과 동시에 손으로 노란 비닐봉지에 배를 담았다. 사과 한 봉지도 구매한 김씨가 덤을 달라며 서운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윤씨가 김씨의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줬다. 말랑말랑해 먹음직스러운 곶감 2개였다. 오전 7시쯤 집을 나서 아침 식사를 거른 김씨는 곶감을 먹으며 잠시 휴식했다.

김씨가 두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 2개는 설에 고향을 찾을 자녀들에게 해줄 음식 재료인 두부·맛살·콩나물·엿기름 등으로 가득했다. 5남매를 둔 김씨는 “우리 자석(자식)들이 식혜와 전을 겁나게 좋아해”라며 환하게 웃었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장날(3·8일)을 맞은 마량시장은 생기가 넘쳤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새벽에 나와 장사 준비를 한 상인들과 설 먹거리를 사러 온 주민들로 왁자지껄했다.

이날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5도. 바닷바람까지 불면서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안팎까지 떨어졌다. 상인도 손님도 너나 할 것 없이 강추위 속에 털모자와 두꺼운 점퍼·마스크·목도리·장갑으로 중무장했다.

경기 불황으로 최근 손님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던 마량시장이 설 대목을 맞아 모처럼 북적이자 상인들의 표정도 오랜만에 밝아졌다.

두부 판매상 박길례(78·여)씨 모녀는 사각형 플라스틱 틀 속 모락모락 김이 나는 두부를 칼로 자르고 봉지에 담아 팔았다. 고령이지만 힘든 기색도 없이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두부 한 판이 12모로 나뉘기 무섭게 손님들이 가게 앞에 줄지어서 구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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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차례상에 올릴 생선을 고르는 손님들의 모습. [프리랜서 오종찬]

상인들과 손님들 사이에서는 유쾌한 실랑이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 공짜로 더 얻으려는 손님의 흥정은 전통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생선 판매상 김순임(41·여)씨는 처음 만난 어머니뻘 손님들을 ‘엄마’라고 부르며 정겹게 맞았다. “나 요놈 하나 덤으로 줄래?” 김씨에게서 조기처럼 생긴 생선 부세 6마리를 2만원에 산 70대 손님이 물었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 크기의 병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가게 주인 김씨는 70대 손님에게 “엄마, 2만원어치 사고 2만원짜리를 서비스로 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먹고살라고…”라고 했다.

김씨의 ‘하소연’에 주변 손님들은 웃음보를 터뜨렸다. 오전 7시부터 장사를 시작한 김씨의 파란색 플라스틱 양동이에는 1만원과 5만원권 지폐가 벌써 수북했다.

설을 앞둔 마량시장은 서로 오랜만에 만난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한파와 폭설 탓에 지난달 말부터 한동안 외출을 자제했던 주민들이 장날에 맞춰 난생처음 세상 구경하듯 호기심 가득한 맘으로 일제히 시장으로 몰려들어서다.

시장 곳곳에서는 “오메 오메, 이것이 누구당가” “겨울에 감기 안 걸리고 잘 지냈소?” 등 반가운 안부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주민들은 각자 장을 본 뒤 3~4명씩 모여 택시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시골 노인들은 자녀에게 줄 먹거리를 사는 데는 쌈짓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택시비 5000~6000원은 나눠 낼 만큼 알뜰했다.

마량시장은 어촌마을 전통시장임에도 외국에서 잡은 생선을 비롯한 수입 수산물 거래도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개방시대에 농어촌의 변화상을 실감케 했다. 러시아산 명태, 노르웨이산 고등어, 에콰도르산 흰다리새우, 중국산 참돔뿐 아니라 미국산 자몽, 페루산 포도도 보였다.

14년째 과일을 팔고 있는 김기모(54)·강민희(46·여)씨 부부는 “불경기에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없었던 손님들이 몰려와 자녀·부모를 위해 지갑을 여는 걸 보니 설은 역시 민족 대명절이라는 걸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강진=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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