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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주향천리(酒香千里)

중앙일보

입력

 외교관이 되면서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최고의 사교수단인 와인은 각종 외교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 각국의 동료 외교관을 집으로 초대하는 홈 파티에도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 초대를 받아 갈 때도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들고 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과 와인 잔을 앞에 두고 국제 정세에 대해 토론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포지엄이라는 말이 ‘함께 와인을 마신다’라는 옛 그리스의 심포시온(酒宴)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와인을 이야기 하면 프랑스 와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흑해와 카스피아 해가 있는 소아시아가 원산인 와인은 기독교와 함께 로마에 전래되어 ‘신의 물방울’로 로마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로마 와인의 가격이 뛰자 로마인들은 식민지 프랑스에 포도원을 만들면서 프랑스 와인이 널리 보급되었다.
유명한 프랑스 와인 산지 보르도(Bordeaux)는 프랑스 남서부의 강이 많은 퇴적 지형으로 일사광선이 풍부하여 포도 재배의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과거 로마 해군의 기지였던 항구가 가까워 판매에도 유리한 곳이다. 보르도 와인은 약간 달콤하면서 감칠맛이 있어 대중적 인기가 높다.

프랑스 와인 생산지의 또 하나의 축인 부르고뉴(Burgogne)는 프랑스 동부의 론강 유역의 기후가 서늘한 지방으로 신맛이 나는 화이트(白) 와인이 비교적 많이 생산되고 있다. 나폴레옹 1세는 우수한 포도를 사용한 부르고뉴 와인을 특별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인 로마네 콘티는 부르고뉴 와인이다.
 보르도 와인 이름에 ‘샤토(Chateau 城)’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부르고뉴 와인에는 샤토가 보이지 않고 ‘도멘(포도원)’으로 표시된 것이 많다. 프랑스의 혁명이후 정부가 몰수한 포도원을 다시 불하할 때 보르도 포도원은 돈 많은 자본가에게 전체를 불하하고 부르고뉴에서는 소상인들에게 잘라 불하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세에 와서 프랑스 와인이 종주국인 이탈리아 와인보다 신뢰를 받는 것은 이탈리아가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와인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프랑스는 통일국가를 이루어 우열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엄격한 정부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보르도 와인을 마시면서 보르도의 1등급(Premier Grand Cru) 와인인 샤토 오 브리옹(Chateau Haut-Brion)의 ‘와인외교’와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Rothschild)의 에티켓을 통한 ‘예술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빈 회의(1814-1815)에서 패전국 프랑스를 대표한 당시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 1754-1838)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샤토 오 브리옹 와인을 제공하여 각국의 대표들이 오 브리옹의 매력에 푹 빠지게 했다. 프랑스가 패전국이면서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된 것은 오 브리옹을 통한 와인외교가 일조를 하였다고 한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에티켓에는 매년 유명 작가(아티스트)의 작품이 실린다. 와인에 붙이는 라벨을 프랑스에서는 에티켓이라고 한다. 예절이나 태도가 불순한 사람을 흔히 에티켓이 없다고 한다. 예절의 에티켓과 와인의 에티켓과 같은 의미이다.
 에티켓은 본래 나무 기둥에 붙이는 표찰을 말한다. 지금도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원 입구에 붙은 표찰(에티켓)에는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의 행동을 나열해 두었다고 한다. 에티켓이 없다는 것은 에티켓에 나열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945년 이래 피카소, 샤갈, 달리, 미로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무통 로쉴드 와인의 에티켓에 들어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작가의 작품이 올려 진 에티켓도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금년에 2013년 빈티지(포도수확연도) 에티켓으로 드디어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이우환의 작품이 선정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65번째의 작가라고 한다.
 2008년 빈티지 에티켓으로 중국 작가 쉬 레이(Xu Lei)가 선정 후 동양인으로 두 번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월 말 샤토 무통 로쉴드 와인 회사의 줄리앙 로쉴드 남작이 서울에 와서 이우환 화백을 만나고 2013년 빈티지 에티켓의 원화를 공개하였다.
 그림 한 점 당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이우환 화백은 에티켓 그림 값으로 얼마나 받을까. 돈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명예로운 거래‘라는 이름으로 돈 대신 자신의 작품이 게재된 2013년 빈티지 와인 5케이스(60병)와 다른 빈티지 무통 로쉴드 와인 5케이스(60병)을 선물로 받는다고 한다.

앞서 에티켓에 그림을 그린 모든 작가들도 돈보다 명예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와인 없이는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와인 애호가인 이우환 화백으로서는 오래된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금년에 80세가 되는 이우환 화백은 경남 함안 사람으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서울대 미대에 다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림 공부한 것이 아니고 동양 철학을 공부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유학자인 할아버지에게 배운 중국 고전을 더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양 철학과 예술을 접속하여 점과 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 오늘 날 세계적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향천리(酒香千里)라는 말이 있다. 무통 와인이 매우 비싸 누구나 쉽게 맛 볼 수 없는 와인이지만 이우환의 에티켓이 붙은 샤토 무통 로쉴드 와인의 향기는 천리에 이를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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