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이긴 샌더스, 힐러리 상대로 사실상 동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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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샌더스(74)는 졌지만 이겼다. '거인' 힐러리 클린턴에 맞서 역대 경선 중 최대 격전을 치른 샌더스의 표정은 흡족해 보였다.

지난해 4월30일 출마선언 당시 아이오와주에 조직 하나 없던 그가 8년을 절치부심한 클린턴과 "사실상 동률"(샌더스)이라 할 정도의 결과를 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경우 각 주마다 승자독식이 아닌 득표율로 대의원이 배정되기 때문에 샌더스로선 이번 결과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샌더스 선풍'을 전국에 각인시키는 엄청난 플러스 효과를 얻었다. 당장 9일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선 샌더스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어 그 확장력이 배가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 10시 50분 경 1700여 명의 지지자가 모인 디모인공항 인근 홀리데이인 호텔에 나타난 샌더스는 "아이오와주가 오늘 밤 정치혁명을 시작했다"고 주먹을 치켜세웠다. "버니! 버니!"를 연호하는 지지자들의 함성에 샌더스는 연설을 이어가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늘 아이오와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권과 기성 경제시스템, 그리고 기성 언론에 매우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만족함을 표한 뒤 연설이 아닌 사실상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선거유세'를 시작했다. 그가 "그동안 정치에 대해 포기했던 이들,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젊은이들, 노동자들, 그리고 노인들이 큰 목소리로 보다 뚜렷하게 목소리를 내자"고 외칠 때 샌더스는 사실상 승자였다.

그렇다면 샌더스가 이번 아이오와 경선전에서 어떻게 유권자의 심금을 울렸을까.

지난달 29일 유세장에서 만난 대학생 멜라니 러셀(23)은 "힐러리는 월가의 백만장자 몇 명으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 정치를 하지만 버니는 그들로부터 단 한푼도 안 받고 300만 명의 개인으로부터 평균 27달러의 소액기부를 받아 여기까지 선거를 끌고 온 데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샌더스라면 뭔가 '깨끗한 정치개혁'을 할 것이란 기대가 아이오와주 곳곳에 팽배했다.

"난 내 야망을 실현하려고 출마한 게 아니다. 나를 뽑아주면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도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1%의 소수 엘리트들이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Enough is enough)'는 싸움에 동참해달라. 미국을, 그리고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젊은이를 움직였다. 막판 샌더스가 단골메뉴로 인용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란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도 유세장의 '합창 구호'가 됐다. 남녀할 것 없이 젊은 유권자들은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샌더스가 '반 발짝' 앞에서 역전에 실패한 이유를 두곤 몇 가지 분석들이 나온다.
디모인 레지스터는 "아이오와 유권자들이 '첫 여성대통령이 나와도 좋다고 보나'는 질문에는 11%가 거부감을 보였지만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도 좋다고 보나'는 질문에는 25%가 거부감을 나타냈다"며 "아직까지 '사회주의자 보다는 여성(대통령)이 낫다'고 본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유세장의 '샌더스 열기'를 이끈 주역인 대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8년에는 대학교가 방학 중(1월 3일)에 선거가 있어 각자 자기 집에서 오바마에 한 표를 던졌지만 지금은 학기 중이라 자신의 주소지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는 분석이다. 실제 출구조사 결과 2008년 선거 당시 전체 투표자 중 17~29세 유권자 비중이 22%였던 게 18%로 떨어졌다.

디모인(아이오와주)=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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