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1945년, 역사가 낳은 야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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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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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이안 부루마 지음
신보영 옮김
글항아리, 464쪽, 2만3000원

빅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태초의 미스터리를 풀면 오늘의 우주가 보이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45’가 필요한 이유 또한 오늘을 알려면 1945년을 독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 미국은 명실상부한 패권국(hegemon)으로 등극했다. 미국이 패권국으로 계속 남으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1945년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안 부루마(65) 바드칼리지 석좌교수가 그리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5000만에서 7000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희생된 전쟁을 대체한 것은 절망과 복수심, 위선과 속임수였다. 어디나 사정은 비슷했다.

사람들은 비슷한 환경에 비슷하게 반응했다. 문명이나 문화의 차이는 행동의 차이를 낳지 않았다.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사람들은 배고팠다. 만주국에서 살던 일본 민간인 중 1만1000명이 귀국하지 못하고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동부 유럽에서 추방된 1000만 명의 독일인들 중 50만 명이 사망했다.

강간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소련군은 200만 명의 독일 여성을 강간했다. 강간은 스탈린이 고무하는 정책이었다. 소련군의 규율이 깨진 결과가 아니었다. 독일군 손에 숨진 800만 명의 소련군에 대한 보복이 ‘필요’했다.

현지 남성에 비해 건강 상태가 좋은 미국·캐나다 유럽 주둔군 장병들은 손만 뻗으면 유럽 여성들과 사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여성을 강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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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필리핀 마닐라 군사법정에 선 일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 마닐라 대학살 책임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진 글항아리]

많은 여성이 식구를 위해 성매매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위안소를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이 일본에서 발생하는 게 두려웠다. 1946년 일본인 미혼모에게서 9만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내장이 위축된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게 갑자기 너무 많은 음식을 줘서 2000여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참극도 있었다. 해방된 수용소에서 생존자들은 본능적으로 섹스에 탐닉했다. 종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는 1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역사 청산은 어디서나 미완이었다. 원칙도 없었다. ‘상징적’인 청산을 위해 ‘재수없는 희생양’이 된 반역자도 많았다. 지도자들은 현실과 타협했다. 부족한 전문 인력을 채우기 위해 민족 반역자가 필요했다. 기득권층에 최소한의 타격만 가했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가 비시 프랑스의 부역자들을 ‘철저히’ 청산했다는 인식에는 ‘신화’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0년』은 드러낸다. 가짜 레지스탕스 투사도 등장했다. 반나치 활동을 하다가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증명서도 암시장에 가면 살 수 있었다.

일본의 역사 청산은 유럽의 경우보다 더 관대했다. 점령군은 일본 사정에 어두워 누가 나쁜 놈인지 가려내기 힘들었다. 만주국 사업부 차관으로서 노예제를 방불케 하는 강제노역의 총책이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는 1957년 일본 총리가 됐다.

저자는 역사학자이지만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이 싹튼 과정을 그려낸다. 보다 평화롭고 평등하고 안전한 세상이 1945년 속에서 꿈틀댔다.

서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은 있었으나 혁명의 빅뱅은 없었다. 우선 스탈린이 혁명을 꺼렸다. 그는 동구권을 집어 삼킨 것에 만족했다. 혁명을 대신한 것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이 강한 복지국가의 탄생이었다.

6개국어를 구사하는 부루마 교수는 세계 100대 공공지식인으로 수 차례 선정된 세계적인 석학이다.

문명도 야만을 낳을 때가 있다. 문명에는 항상 야만의 그늘이 드리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2016년에 전쟁이라는 야만이 싹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S Box] 해방 직후 일본 신사 불태워

책에 나오는 한국 관련 주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이른바 위안부 여성들은 징발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국이나, 일본군 치하의 국가에서 납치되었다. 이들은 사실 일본군 공창의 성노예였다.

 - 해방이 되자 사람들은 식민지 압제의 주요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에 달려가서 망치로, 몽둥이로, 때로는 맨손으로 신사를 부쉈고, 나중에는 불질렀다.

 -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을 다소 골칫거리로 여겼지만, 국무부의 여권 담당 여직원은 이승만을 ‘친절하고 애국적인 노신사’로 생각했다.

 - 한반도 북부에서는 나이를 막론하고 여성과 소녀들이 소련 군인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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