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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 사랑 느껴보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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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16면

대극장을 빈틈없이 채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단발성 콘서트도 아니고 일정 기간 동안 공연되는 대형 뮤지컬이라면 더욱 그렇다. 뮤지컬 제작사들이 스타 배우를 잡으려 캐스팅 전쟁을 벌이는 이유다. 그런데 국내 최대 규모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의 올해 첫 뮤지컬 ‘드라큘라’(1월 23일~2월 9일)는 최고의 티켓파워 김준수와 함께 다소 낯선 얼굴의 배우가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다. 지난 2014년 초연 당시 정식 캐스팅이 아닌 언더스터디로 나왔던 뮤지컬 배우 박은석(31)이다.


당시 김준수, 류정한에 밀리지 않는 놀라운 무대로 호평받았지만, ‘드라큘라 ’이후 행보는 신중했다. 지난해 출연한 대형 뮤지컬은 ‘드림걸즈’ 단 한편. ‘왕세자실종사건’‘주홍글씨’‘씨왓아이워너씨’ 등 작품성 있는 중소규모 뮤지컬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이번 ‘드라큘라’ 앙코르 공연에서 당당히 더블캐스팅에 이름을 올렸다.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그를 15일 만났다. 보름 동안 3000석 대극장을 어떤 매력으로 채울지 궁금했다.

박은석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반전남이었다. 지난해 ‘드림걸즈’에서 보여준 천연덕스러운 코믹연기를 칭찬하자 본인은 “원래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강인한 첫인상이 누구보다 대범해 보이지만 “쓸데 없는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주목하게 된 순간부터 그랬다. ‘드림걸즈’의 소울 넘치는 흑인가수 지미 역을 할 때다. 화끈한 코믹 연기와 시원한 가창력으로 객석을 들었다 놓는 카리스마가 인지도는 낮아도 실력이 출중한 연기파 중견배우로 착각할 정도였지만, 알고 보니 갓 서른을 넘긴 신인배우였던 것이다.


“제가 많이 늙어 보이나요? 원래 노안이긴 한데 무대에서도 그렇구나….(웃음) 사실 쇼 뮤지컬은 처음이었고 흑인 음악을 해야 해서 걱정이 많았어요. 제작사인 오디뮤지컬에서도 제가 경험이 없으니 불안한 상황이었을 텐데 ‘일단 가보자’고 믿어주셨죠. 첫 공연 끝나고 신춘수 대표님이 ‘은석아, 너를 데리고 모험을 두 번 했다. 잘해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그때 힘이 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생겼죠.”


재작년 ‘드라큘라’ 이전까진 무명이었다. 2010년 ‘몬테 크리스토’로 데뷔해 ‘영웅’ 등에서 주로 앙상블로 서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페뷔스 역을 할 때 ‘드라큘라’를 준비중이던 데이비드 스완 연출의 눈에 띄게 됐다. “노트르담 드 파리 공연 때 선배들을 보러 오셨길래 저도 처음 인사를 드렸는데, ‘드라큘라’ 오디션을 왜 안 봤느냐는 거예요. 몰랐다고 하니 보러 오라고 하셔서 조나단 역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안 됐죠. 포기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왔어요. 드라큘라 언더스터디를 하겠느냐고.”


‘언더스터디’란 한 작품에서 다른 배역을 맡은 배우가 주인공 역할을 연습해 뒀다가 주연 배우에게 갑작스런 사정이 생길 때 긴급 투입되는 소위 ‘땜빵용’ 배우다. 언제 ‘그 날’이 올지 알 수 없는 게 보통이지만 박은석의 경우는 달랐다. 처음부터 ‘4회 이상’을 보장하며 역할을 제의했고, 다른 배역 없이 오로지 드라큘라역만 했다. 연습 과정에서 가능성을 확인받고 8회로 보장 회차가 늘며 프레스콜까지 등장했고, 박은석의 기량에 감탄한 류정한의 배려로 결국 총 9회를 소화했다. “주연으로 설 수 있는 첫 기회인 만큼 한 회를 하더라도 꼭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제 가능성을 믿어주는 게 감사해 더 열심히 했고요.”


하지만 매일 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서며 단단한 호흡을 만들어 가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가끔씩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부담감이 컸죠. 첫 주연인데다 1주일에 한 번씩만 무대에 서니까요. 1주일 동안에 공연 자체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같이 쫓아가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날마다 등장 출입구 쪽에 계속 서서 지켜봤지만, 막상 오랜만에 상대배역을 만나면 훨씬 커져 있는 호흡을 맞추느라 급급했어요. 쫓겨서 하다 보니 제 것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컸죠. 이번엔 그런 부담은 없으니 더 자유롭게 해보고 싶어요.”

언더스터디에서 더블 캐스팅으로 전격 발탁뮤지컬 ‘드라큘라’는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지킬 앤 하이드’의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아름다운 선율이 일품이다. 400년의 세월 동안 한 여인만을 향해 있던 강렬한 사랑 이야기다. 요즘 세상에 있을 리 없는 판타지 중의 판타지를 연기하는 배우는 공감이 될까. 그는 “사랑보다 훨씬 깊은 운명으로 이해하며 드라큘라에 다가가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투르그 작가님께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 시대 사람들은 영지적인 기독교관을 갖고 있었다죠. 운명적이고 신비주의적이란 건데,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다는 얘기죠. 초연 때는 거기까지 생각 못했는데, 드라큘라가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세계관 때문이었을 거예요. 십자군 전쟁 때 종교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이고, 그 안에서 부인 엘리자벳과의 사랑은 자기 운명의 완성이었고 오직 그 사람밖에 없었던 것이죠. 신을 위해 자기 목숨도 내놨는데 가장 사랑하는 걸 뺏어가니까 그에 대한 분노가 어땠을까요.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요즘의 가벼운 사랑과는 다른 사랑일 거예요. 드라큘라의 사랑은 훨씬 깊은 것이구나, 삶 깊은 곳에 있는 세계관과 연결돼 있구나 싶어서 그 사랑은 좀 더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고요.”


수백 살 먹은 노인과 젊은 청년의 모습을 오가며 인간도 신도 아닌 초현실적인 드라큘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캐릭터다. 하지만 동화 속 왕자님처럼 신비스러운 김준수의 드라큘라와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연기에 대해 확신도 있어 보였다.


“뱀파이어의 초월성에 대해 너무 고민하면 형식적인 표현이 나올 것 같았어요. 그저 뱀파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죠. 드라큘라의 삶, 인생의 여정을 깊이 생각하면서 제 자신을 믿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준수의 경우는 동화 속 순수한 사랑이 잘 묻어나오는 배우지만 제가 가진 것들은 다르니까, 브램 스토커 원작의 고전에서 풍기는 이미지적인 도움을 받아서 가려 합니다.”

관 속에 누운 채 날아다니는 장면에 “식겁합니다”오히려 가장 어려운 점은 무대기술적인 부분이다. 남자다운 외모와 달리 천장에 매달린 관 속에 누운 채 날아다니는 장면에 ‘매번 식겁한다’며 혀를 내두른다.


“제 키가 186cm인데 관이 작아서 머리가 닿아요. 조명이 위에서 비치니 객석에 얼굴이 보이려면 몸을 한참 구겨야 하죠. 허리 안전벨트 하나에 의존하는데 초연 테크 리허설 때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내려오면서 ‘어어어~’ 비명을 질렀죠. 밑에선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내려올 때 바이킹 타는 것처럼 아랫배가 싸해지거든요. 잠들어 있다가 눈을 뜨면서 진중하게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실은 몸을 잔뜩 구긴 상태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거죠. 준수는 콘서트 때 잠실 체육관 같은 데서 플라잉에 단련이 된 모양인데, 놀이기구밖에 경험이 없는 저로선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웃음)”


인지부조화의 절정은 지금부터다. 배우라기보다 운동선수로 보일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액션영화를 찍어도 어울릴 법한 남성적인 이미지지만, 8년간 얌전히 앉아서 향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고1 때까지는 검도를 했어요. 잠시 브레이크 댄스를 추겠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슬럼프에 빠졌죠. 결국 운동을 그만 두고 방황할 때 우연히 피리소리를 들었어요. 소리가 참 좋더군요. 가끔 TV에서 들어봤지만 라이브로 제대로 들으니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피리가 남성적인 악기잖아요. 소리도 크고. 운동하던 힘이 남아 있으니 힘으로 밀어붙였죠. 도 닦는 느낌이었어요. 판소리 득음하려 수련하잖아요. 악기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악기로 자기 색깔을 내야 하니 연습실에 처박혀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만의 매력도 있었어요.”


대학 3학년까지 피리를 전공했지만 군대에 다녀오면서 고민이 생겼다. 운동을 하고 몸을 쓰던 기억이 살아나니 다시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졌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다 어린 시절 예고 연극영화과에 응시했던 일이 떠올랐다. 막연히 동경하던 배우가 되기로 결심이 서자 바로 행동에 옮겼다. 2009년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곧바로 데뷔 무대를 밟았다.


“노래를 워낙 좋아했지만 사실 뮤지컬을 본 적도 없었어요. 지나다니면서 광고 영상 정도 본 게 다였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얼른 공연을 해보고 싶었어요. 나이도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2학년 때 바로 오디션을 봐서 ‘몬테 크리스토’로 데뷔를 했어요. 그게 제 첫 뮤지컬 경험이었죠. 더 이상 맘이 변하면 스스로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 목숨 걸고 그저 배운대로 열심히만 했어요.”


검도와 국악을 각각 8년씩 했고 올해로 뮤지컬을 시작한 지 8년째. 그는 “이제 배우를 천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뮤지컬로 시작했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연극도 하고 싶어졌고, 영화건 드라마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기 욕심이 난다고.


“제가 이것저것 많이 했죠. 돌아보면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그 시간들이 제게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최종적으로 배우를 하고 있으니 다 도움이 되고요. 배우는 신체도 중요하고 뮤지컬 배우에게는 음악적 감각도 중요하잖아요. 그런 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상상도 못할 것 같습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객원기자·씨제스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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