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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정의화 의장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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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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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대기자

정의화 국회의장은 옳았다. 2012년 18대 국회의 끝 무렵이다. 그는 국회의장 직무대행(새누리당 소속)이었다. 새누리당 주도로 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이 상정됐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법 개정으로) 시급한 민생 법안과 국익 법안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식물국회가 되고 국정 운영에 대혼란이 발생한다.” 그 호소는 외면당했다. 그해 5월 선진화법은 통과됐다. 이어서 19대 국회가 시작됐다. 그의 불길한 예견대로다. 국회는 망가졌다. 19대는 역대 최악이다.

 선진화법은 낡은 정치문화와 결합했다. 그 바탕은 비타협과 불신, 배척과 투쟁이다. 그 교배는 기이한 변종을 낳았다. 괴물의 탄생이다. 괴력은 제어되지 않는다. 야당 의원 한 명만 틀어져도 상임위는 엉망이다. 국회의 기능 마비는 습관성이다. 괴력은 쟁점 법안의 의결정족수에서 나온다. 그 규정은 재적 5분의 3(60%) 이상의 중(重) 다수결이다. 단순 과반수(50%)는 ‘예외’로 밀렸다. 정 의장의 말대로다. “제헌의회(1948년)부터 이어진 국회 운영의 근본 틀이 바뀌었다.”

 괴물은 악성 진화했다. 정치 불복(不服) 풍조가 퍼졌다. 총선 승리는 과반수 의석 확보다. 그 수치의 위력은 약하다. 60%가 돼야 진짜 여당이다. 선진화법은 다수결의 상식을 교란시킨다. 그것은 국민 선택에 대한 배신이다. 새누리당 의석수는 155석(53%)이다. 새누리당은 입법 주도권을 잃었다. 국회는 소수당의 패자부활 무대다. 소수당은 법안 거부권을 쥐었다. 소수야당 동의로 국회는 가동한다.

 선진화법 예찬론자는 몸싸움 퇴치를 내세운다. 그 명분대로 동물국회는 사라졌다. 그것은 한가한 자찬이다. 국회 기능은 사회적 갈등과 분란의 정리다. 법안 처리로 갈등은 정비된다. 하지만 선진화법은 갈등을 누적시킨다. 갈등의 출구는 막힌다. 국민적 불만과 원성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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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 개혁은 결단의 지도력으로 이뤄진다. 입법부는 과반수 찬성으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미국 루스벨트의 뉴딜 법안,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관련 법도 그랬다. 영국 대처 총리의 노조개혁 법안도 과반수 결단이다. 선진화법은 결단의 리더십을 방해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어젠다는 일자리다. 서비스 산업법의 일자리 창출 추정치는 최다 69만 개. 하지만 선진화법 국회의 생산성은 바닥이다. 박 대통령의 지적은 절박하다. "서비스 산업법은 무려 1474일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박 대통령은 민심의 결집·동원운동에 동참했다. ‘경제활성화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이다. 박 대통령은 “오죽하면 국민들이 나서겠는가”라고 했다. 그것은 민심으로 국회 포위다. 그에 따른 논란은 계속된다. 하지만 취업한파는 이어진다. 국회는 젊은 세대의 취직 고통을 묵살한다.

 1류 민주 국가들의 의회 룰은 50%다. 그것은 오랜 통찰과 절제의 산물이다. 타협과 절충은 한계를 갖는다. 우리 헌법 규정도 단순 과반수다. 선진화법은 헌법을 무시한다. 60% 가중 다수결은 무모하고 안이하다. 지나친 명분은 편법과 위선을 낳는다. 19대 국회는 법안 끼워팔기의 흥정으로 얼룩졌다. 소수 의견은 존중해야 한다. 다수 횡포는 막아야 한다. 하지만 소수의 권한 과잉도 의회 정치에 역행한다.

 정치 개조는 4·13 총선 쟁점이다. 새 인물에 대한 국민적 갈망은 크다. 하지만 새 인물로 채워져도 국회(20대)는 달라지기 힘들다. 다음 대선에서 야당이 이겨도 마찬가지다. 선진화법 국회의 실패는 구조적이다. 과거 3김(金) 정치의 탁월함은 우선순위와 경중(輕重)의 판정이다. 선진화법 개정은 시급하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도 여기에 쏠려야 한다.

 새누리당은 선진화법 개정안을 냈다. 개정안은 60% 룰을 그대로 뒀다.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 상정 권한만 확대했다(재적 의원 과반수 요구). 개정 절차도 선진화법 적용을 받는다. 그 때문에 편법으로 본회의에 넘겼다. 결자해지(結者解之)도 힘들다. 괴물 제조의 업보다. 김무성 대표는 선진화법 제조를 ‘사과’했다. 하지만 당내 법안 주도자들의 자성과 자책은 부족하다. 새누리당은 원죄의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서야 한다. 개정의 절실함을 알려야 한다. 공은 이제 정 의장에게 넘어갔다.

 정 의장의 삶 속에 우연과 기연이 있다. 그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다. 그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다. “희한하다. 나는 일을 몰고 간다. 당직 의사 때면 환자가 몰렸고, 내가 가는 식당엔 뒤따라 손님이 들어온다.” 그는 선진화법의 폐단을 예고했다. 예견의 당사자가 그 법의 최종 처리를 맡게 됐다. 그것도 희한한 인연이다.

 괴물은 악성코드를 감염시킨다. 기능 쇠퇴는 국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 정책 마비로 번진다. 제거하고 제동을 걸어야 한다. 국회는 정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것은 선진화법 개정으로 출발한다. 정 의장의 선택과 결단은 운명이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