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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길어 혈압 높은 기린 중풍을 어떻게 피할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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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25면

현생 기린과 동물에는 오카피와 6종의 기린이 있다(사진 1).

기린과 사람, 그리고 고래는 모두 젖먹이동물(포유류)이지만 생김새는 크게 다르다. 기린은 네 발로 서지만 사람은 두 발로 서고 고래는 발이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목에서 나타난다. 기린의 목은 엄청나게 길지만 사람의 목은 짧고 고래는 목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겉모습을 벗겨내고 뼈대만 살펴보면 놀랍게도 같은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크기와 비례만 다를 뿐이다. 놀랍게도 사람·고래·기린의 목뼈는 모두 일곱 개로 똑같다. 기린의 목뼈는 개수가 더 많은 게 아니라 각각의 뼈 크기가 큰 것이며, 고래의 목뼈 일곱 개는 융합돼 고개를 돌리지 못할 뿐이다.


중·고교 시절 생물교과서에서 기린의 목이 점점 길어지는 그림을 누구나 봤을 것이다. 오늘날 기린의 긴 목은 높이 있는 식물의 잎을 먹기 위해서 목을 조금씩 늘이다보니 이렇게 길어졌다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설명하는 그림이었다. 또 바로 옆에는 목이 짧은 기린과 목이 긴 기린이 같이 있다가 목이 긴 기린만 후손을 남기는 데 성공해서 결국 모든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설명하는 그림도 있었다. 용불용설이 맞든, 자연선택설이 맞든 기린의 목은 길다.


 기린 목뼈 개수는 사슴·고래처럼 7개그렇다면 기린의 목뼈는 왜 이렇게 길까? 처음부터 길었던 것일까, 아니면 서서히 길어진 것일까? 어떤 동물쌍이든 공통 선조가 있다. 기린과 오카피도 마찬가지다. 현재 살고 있는 기린과(科) 동물은 기린·오카피 두 종뿐이다. 기린은 목이 길고 오카피는 그렇지 않다. 기린과 오카피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은 것이다.

기린과 동물의 사촌 격인 크세노케릭스 아미달라에(왼쪽). 아직 목이 길지 않다. 아미달라에라는 이름은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파드메 아미달라(오른쪽)와 닮아서 붙었다.

크세노케릭스 아미달라에(Xenokeryx amidalae)는 1600만 년 전 지금의 스페인 지방을 배회하던 초식 젖먹이동물이다. 몸집은 현생 사슴과 비슷하지만 얼굴은 그 어떤 현생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송곳니는 길쭉하고 특히 양 눈 위쪽과 두개골 뒤쪽에 털로 덮인 인각(麟角, ossicone)이 솟아 있어서 마치 괴상한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속명(屬名) 크세노케릭스는 ‘이상하게 생긴 뿔’이라는 뜻이고 종명(種名) 아미달라에는 영화 ‘스타워즈’에서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숨겨놓은 아내이자 루크 스카이워커의 어머니인 파드메 아미달라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동물이 사슴과 기린 중 어디에 속하는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는데 지난해 12월 마침내 이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이 고생물은 기린의 사촌으로 약 3000만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적어도 이 때까지는 기린 친척의 목은 길지 않았다.


뉴욕공과대학의 고생물학자인 니코스 솔로우니아스(Nikos Solounias)는 기린의 목이 길어지는 과정을 연구한다. 그는 의대 학생인 멜린다 다노위츠(Melinda Danowitz)와 함께 영국·오스트리아·독일·스웨덴·케냐·그리스 등 세계 각지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멸종한 기린과 9종, 현존하는 기린과 2종의 화석 71개체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지난해 10월 『로열 소사이어티 오픈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에 따르면 기린의 목뼈는 1600만 년 전부터 살짝 길어지기 시작했다. 700만 년 전쯤 현생 기린의 멸종한 친척인 사모테리움(Samotherium)에서 목이 길어지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목뼈는 C1, C2, … C6, C7과 같은 식으로 위에서부터 차례로 번호를 붙인다. 그런데 초기에는 머리뼈 쪽의 목뼈, 즉 C1~C3가 길어졌다. 100만 년 전쯤에는 아래쪽 목뼈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즉 목뼈의 변화는 두 단계로 분리돼 일어난 것이다. 현생 기린은 두 단계를 모두 거친 유일한 종이다. 현생 기린의 C3 목뼈는 길이가 너비에 비해 아홉 배나 되며 성인의 위팔뼈만큼이나 길다.

둘 다 목뼈는 일곱 개이지만, 오가피는 목이 길지 않다(사진 2).

물론 기린과의 모든 종들이 목이 길어지는 경로를 걸은 것은 아니다. 기린의 목이 길어지는 사이에 다른 기린과 동물들은 목이 짧아졌다. 오카피는 목이 짧아졌다. 이 과정도 두 단계로 나뉘어서 진행됐다.


신생대에 기린이 살고 있다면 중생대에는 목긴공룡(용각류)이 있었다. 쥐라기 말기에서 백악기 초기에 살았던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대표적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목긴공룡이다. 목뼈는 열아홉 개이고 목의 길이만 9~10m나 된다. 많은 과학자들이 의문을 품은 것은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도대체 물을 어떻게 먹었냐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 되지!”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장과 두뇌까지의 높이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뇌까지 혈액을 펌프질해서 올리려면 강한 혈압을 유지해야 할 텐데, 그러다가 물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뇌의 혈관이 터질 것이고 그러면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모두 뇌중풍에 빠지거나 최소한 두통으로 고통받아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두뇌나 혈관처럼 연한 부분은 화석으로 남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생 생물을 살펴봐야 한다. 이 때 기린은 최적의 모델이다. 기린의 심장은 길이 60㎝ 이상, 무게 10㎏ 이상이다. 중력에 대항해 두뇌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일반 대형 포유류보다 두 배 이상 높은 혈압을 유지한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였을 때 혈관이 파손되지 않는다. 그 비밀은 두뇌 밑에 있는 소동정맥그물(rete mirabile)이라는 혈압조절기관에 있다. 스폰지처럼 생긴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개를 숙이면 마치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소동정맥그물로 혈액이 스며들어갔다가 고개를 들면 빠져나오는 것이다. 혈압이 세면 두뇌뿐만 아니라 다리에는 상시적으로 강한 혈압이 부하된다. 액체는 저절로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다른 대형동물의 경우 혈압이 두 배로 높아지면 혈관 바깥으로 피가 빠져나올 수밖에 없지만 기린의 경우 혈관 외벽이 매우 두껍고 질긴 껍질로 둘러싸여 있어서 혈관 바깥쪽 압력이 안쪽 압력만큼이나 높아 혈관이 유지된다.


그렇다면 목긴공룡에게도 소동정맥그물이나 질긴 혈관 외벽이 있었을까? 그것은 화석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브라키오사우루스에게는 아예 이런 장치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키오사루우스의 혈압을 걱정한 까닭은 목을 곧추세우고 꼬리를 질질 끌고다니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브라키오사우루스 같은 목긴공룡은 목과 꼬리를 수평으로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력에 대항하는 강한 혈압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된다.

상어의 미주신경은 최단거리로 아가미궁으로 연결되는 데 반해 기린의 후두신경은 무려 4.6m나 우회한다. 이는 기린의 긴 목이 지적 설계자의 창조물이 아니라 점진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강력한 증거다. [사진 김영사]

 무게 10㎏이 넘는 심장으로 혈액 공급기린의 소동정맥그물은 생명과 진화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진화는 이미 있는 장치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구조와 기능을 창조해낸다. 하지만 똑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소위 창조과학자 또는 지적설계론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린의 혈압과 현상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했으나 이 복잡한 모든 요소들이 어떻게 종합적으로 기린이 생존하도록 작동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기린이 물을 마시고 일어나는 순간 경정맥의 밸브는 다시 열렸고, 갯솜(스폰지)조직의 모세혈관과 뇌척수액의 역압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서, 기린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뇌출혈은 커녕 순간의 두통도 없이 거대한 기린은 하나님의 창조를 맘껏 즐기며 마치 다윗이 노래하는 것 같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린의 목을 해부해보면 지적설계자가 기린을 창조했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형태가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지상 최대의 쇼』(김영사) 479쪽에는 기린과 상어의 후두신경을 비교한 그림이 나온다.


상어의 경우 아가미궁 뒤로 지나가야 하는 미주신경들은 최적의 경로로 곧장 목적 기관인 아가미를 찾아갔다. 하지만 젖먹이동물(포유류)의 신경은 최적의 경로가 아니라 먼 거리를 우회하고 있다. 이것은 포유류의 조상이 어류 선조로부터 점점 더 멀리 진화하면서 신경과 혈관들도 여러 방향으로 당겨지고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 후두신경이 10㎝ 정도 우회한다. 이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기린 후두신경은 ‘지적설계’ 반박 증거하지만 기린의 후두신경은 얘기가 다르다. 후두신경은 미주신경과 다발로 묶인 채로 후두를 몇 ㎝ 옆으로 지나친다. 신경은 목 끝까지 내려가고 저 멀리서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길을 돌아온다. 무려 4.6m나 우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에 지적 설계자가 설계를 했다면 아래로 내려가는 신경다발에서 후두신경을 따로 떼어내 4.6m의 여정을 몇 ㎝로 줄였을 것이다. 기린의 후두신경만 봐도 생명은 잘 설계된 창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생명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설계된 창조물이 아니라 환경 상황에 우연적인 적응의 결과물이다. 젖먹이동물의 후두신경의 우회는 설계자 개념을 반박하는 증거다.


기린의 목이 점진적으로 길어지다보니 기린의 후두신경도 조금씩 더 우회하다가 4.6m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1㎜ 늘어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사소했다. 그게 쌓여서 4.6m가 되었을 때는 우회의 총비용이 아주 커졌다. 이쯤 되면 ‘질러가는’ 돌연변이가 발생한다면 그 개체는 생존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정모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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