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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전쟁'에 취약한 서방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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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지만 서방 세계는 치명적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새해 벽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졌던 '천연가스 전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의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이 아주 잠깐 천연가스의 공급을 중단하자 바르샤바에서 파리에 이르는 대다수 유럽 도시들은 곧바로 가스 품귀 사태를 겪어야 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실력행사를 했다. 하지만 프랑스.독일 등 그 어느 강대국도 항의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실제로 독일은 가스 수요의 40%, 프랑스는 35%를 러시아에서 들여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석유값이 배럴당 60달러를 호가하는 마당에 굳이 러시아를 화나게 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폴란드.헝가리.체코 등 EU의 동료 국가들이 심각한 피해를 봤지만 그들을 대신해 러시아와 정치적 충돌을 빚을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푸틴의 완력에 꼼짝 못한 것은 서방 세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란은 더욱 불길한 징조로 다가오고 있다. 이란 정부는 최근 들어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우라늄 농축 재개 방침을 공공연히 흘리고 있다. 지난 3년간 협상을 거듭하며 온갖 유인책과 당근을 제공해온 EU와 미국으로선 분통 터지는 일이다.

불행히도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새 이란 대통령은 날이 갈수록 독설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이란에는 매일 400만 배럴씩 수출하는 석유가 있다. 세계 석유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여서 이란이 수출을 중단하는 즉시 유가는 2~3배 폭등할 게 분명하다. 이란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란이 강경 일변도로 나가는 것도 이처럼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를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러시아-이란 커넥션'이다. 러시아는 최근 이란의 노후한 미그 29 전투기를 현대화해 주기로 합의했다. 서방 세계는 대(對)이란 봉쇄정책에 러시아의 동참을 바라지만 역사상 유례없는 고유가 행진은 러시아의 홀로서기를 가능케 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이 자원을 무기로 서방 세계를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일찍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21세기 권력은 다름 아닌 석유에서 나오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러시아.베네수엘라 같은 독재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전제주의 국가, 중동이나 인도네시아처럼 주변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나라에 묻혀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그 귀한 석유.천연가스와 별 인연이 없다.

어떻게 하면 이처럼 치명적인 의존 현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대안은 단 하나다. 원자력이다. 일본은 현재 원자력 발전소 1개를 짓고 있고 12개를 더 지을 예정이다. 한국도 8개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미국도 40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를 새로 짓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EU뿐이다. 이번 푸틴의 실력행사는 EU가 서둘러 에너지 안보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21세기 국제정치 무대에서 결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요제프 요페 독일 디 차이트 발행인 겸 편집인

정리=박신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