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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떼 방북 처럼 담대한 대북 접근할 ‘제2 정주영’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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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12면

평양 출신인 강인덕 경남대 석좌교수는 1961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발을 디딘 후 북한정보국장을 지냈고, 현재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55년간 북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보수 성향이지만 김대중 정부 첫 통일부 장관을 맡아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초기 대북 햇볕정책을 균형감 있게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하다.

새해를 맞아 그동안 경색됐던 남북 관계의 돌파구가 마련되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해 12월 차관급 당국 회담이 결렬됐고, 온건파로 분류돼 온 북한 대남총책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사망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1일 신년사에서 “누구와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박근혜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실망감을 입에 담았다.


좀처럼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남북 관계의 길을 묻기 위해 강인덕(84)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를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에서 이뤄졌고, 김정은의 신년사 관련 대목 등은 2일 전화 취재로 덧붙였다.


-남북 관계의 매듭이 어디서부터 꼬여 있다고 보는가.“남북한 모두 내부 정치가 안정돼야 남북 관계가 잘된다. 1972년 남북 대화가 시작될 때 김일성은 70년 11월 노동당 5차 대회 후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해 정치사회적인 안정을 이뤘다. 박정희 대통령도 중화학공업 등 경제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고 보릿고개도 넘어섰다. 집권 5년차를 맞는 김정은도 새로운 대남정책을 결정할 때가 됐고, 박근혜 대통령도 지금까지 원칙을 지키며 잘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국회와 정치권이 이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 통일 문제 해결의 열쇠인데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 4월 총선과 5월 북한 노동당 대회 등 일정을 볼 때 시간이 없다. 이제는 정말 정치하는 사람들이 결심해야 할 때다.”


-박근혜 정부는 깐깐한 입장이고 김정은도 기세에 밀리지 않겠다는 분위기다.“남북한은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돈이 없어 통일을 못한 게 아니다. 또다시 ‘통일항아리(통일기금 모금 캠페인)’ 같은 거 만들어선 안 된다. 우리에겐 기술·인재·돈이 다 있다. 몇십억 달러도 북에 줄 수 있다. 문제는 신뢰다. (소떼 몰이 방북을 했던)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담대한 대북 접근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86년 북한과의 금강산 개발 합의를 시작으로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았다. 북한은 달러벌이 관광이 필요했고, 김대중 정부는 대북 돌파구를 모색했다. 양측의 기류를 잘 읽고 정주영은 협력모델을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남북한이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촉박하다. 이제 민간이 통일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 10년 넘도록 제2의 정주영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7차 당 대회(5월) 때 “휘황찬 설계도를 펼칠 것”이라고 예고했다. 중대 발표가 나올까.“어렵다고 봐야 한다. 개혁·개방도 진전이 없을 것이다. 2015년 신년사에서 언급한 개방특구 문제 등이 이번엔 빠졌다. 그럴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이다. 맨땅에 어느 외국 기업이 투자를 하겠나.”


-2016년 북한을 어떻게 전망하나.“인민 생활과 경제 문제에 치중할 것이지만 성과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전력 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했다. 기간산업이 전기 때문에 안 돌아가는 게 큰 고통일 것이다. 결국 자본이 없으니 극단적인 노력 동원에 의존할 것이고 특히 청년들을 건설장에 많이 투입할 것이다. 이래저래 주민들로선 고단한 한 해가 예상된다.”


-7차 당 대회는 어떤 의미가 있는 행사인가.“80년 10월 6차 대회 이후 36년 만에 개최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아버지 통치를 평가하고 자신의 집권 4년간을 포함해 3대(代)를 다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경제 문제다. 먹는 문제를 포함한 경제 비전을 어떻게 제시할지 걱정된다. 60년 4차 당 대회 때 김일성이 7개년 경제계획을 제시했는데 차질이 생겨 10년이 걸렸다. 둘째는 인사 문제다. 7차 당 대회를 기점으로 구세대는 거의 물러날 것이다. 셋째는 조직 문제, 즉 노동당의 기구 개편이다. 김일성 시기로 돌아가려 할 공산이 크다. 김정일의 선군(先軍)사상은 유지하겠지만 선군정치는 안 될 것이다. 당 중심으로 가기 위한 노동당 규약 개정 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남정책에도 변화가 있을까.“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남북 관계를 북한이 ‘투 코리아(two Korea)’로 가져 가려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지난해 8월 자신들의 표준시라며 ‘평양시간(한국보다 30분이 늦음)’을 설정한 것이나 8·25 합의 때 ‘대한민국 청와대’로 호칭한 것 등이다. 김정은이 투 코리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장난을 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양건의 급작스러운 사망을 둘러싸고 일각에서 의혹이 제기된다.“부음을 접하고 두 사람이 생각났다. 76년 사망한 남일 부수상과 2010년 숨진 이제강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다. 두 사람 모두 김양건처럼 교통사고로 죽었다. 과거 김일성·김정일 시기에는 반드시 자기가 차를 몰고 파티 등에 오게 했으니까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사고사 하는 경우가 있었겠지만 지금도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김정은이 장의위원장을 맡고 나온 걸 보면 과거처럼 의도적으로 실행한 건 아닌 듯하지만 상당한 타격이다. 저만한 인재가 자주 나오는 게 아닌데. 김일성대 불어과를 나오고 국제부장하고 통일전선부장하고 했는데, 오랜 기간 훈련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이 후임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지만 김양건만한 인재가 있을까.”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남북 관계 진전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다.“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 때 곧바로 북한이 공식적인 유감 표명을 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뢰를 가지고 금강산을 가겠나. 나는 상호주의란 말을 강조하고 싶다. 박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는 일방적이지 않고 양쪽이 움직이자는 것이니 북쪽도 우리보고 뭘 해 달라고만 하지 말고 보여 줄 것은 보여 줘야 한다. 그런데 김정은이 남쪽과 뭘 풀어 나가려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짧은 후계 수업기간 때문에 제왕학을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권력기반도 만들지 못했고 하니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고령 실향민들이 이산의 한을 품고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왜 금강산에 이산상봉장을 만들었나. 내가 장관일 때 판문점 자유의 집을 증축했는데 이산상봉장을 염두에 두고 시설을 마련했다. 남북 중립지대에 상봉장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금강산은 말 그대로 관광지다. 왜 거기에서 상봉하고 당국회담 하는지 못마땅하다.”


-정부가 ‘통일 대박’이란 화두를 들고 나왔지만 통일이 정말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매너리즘에 빠졌다. 새 시대가 열린다는 감각이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일류국가를 꿈꾸기 어렵다. 통일이 되면 영토도 22만㎢로 넓어지고 인구도 7000만 이상으로 많아지니 새로운 비약의 토대가 마련된다. 통일에 엄청난 비용이 들고 통일국가는 가난해질 것이란 얘기도 나오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시작됐다. 평양 출신인 내가 해방 후 처음 남한에 오니 시골에 농로(農路)가 없고 굴뚝이 없더라. 남한엔 양반이 많아 봉건적 요소 때문에 발전이 안 된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북한의 경제 수준을 앞선 건 60년대 말에 와서다. 북한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을 포함해 단순 지원이 아닌 국토 재개발 수준의 통일 플랜을 그려야 한다.”


-취업난을 겪는 청년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우리 젊은이들의 힘이 북쪽에 들어가면 열매가 맺어질 것이다. 우리의 선진 공업기술을 북에다 제공하면 즉각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를 돌파하기 어렵다. 통일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게 할 것이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서재준 기자?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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