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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견해 주입 금지” 1976년 서독, 좌우 대타협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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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부 독일에 위치한 소련 점령지’와 ‘독일민주공화국(DDR)’.

[평화 오디세이 2016] 통일, 교육부터 시작하자 <상>
독일 통일교육 대원칙 “모든 수업서 확고한 위치”

정치교육학자들 끝장 토론
“이견은 교육 현장서 논쟁”
11개 주 장관들 공동 지침서
“통일교육 따로 해선 안된다”
교과서는 객관적 사실 위주

 통일 전인 1970년대 서독의 12~13학년 학생들이 배우던 사회 교과서 2개에 실린 동독에 대한 표현이다. 두 교과서는 모두 ‘디스터벡 출판사’ 한 곳에서 만들었다. 전자(소련 점령지)는 70년, 후자(독일민주공화국)는 73년에 발간됐다. 동독의 공식 국가명은 ‘독일민주공화국’이었다.

 72년 동·서독은 상대국을 서로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곧바로 교육 현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동방정책을 펴면서 소련 점령지라고 비방하기보다는 객관적 사실과 정보를 주는 쪽으로 통일교육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

 ①기본조약 체결 이후 달라진 교과서=서독의 통일 교육은 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정치 교육의 일환이었다. 역사·사회·지리·국어 등 여러 교과목에서 동독과 독일 민족,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하지만 ‘통일 교육’이란 단어 자체는 쓰지 않았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결과로 분단됐고, 유럽 국가들이 독일 통일을 경계해서다. 서독은 ‘통일’ 대신 ‘독일 문제’라는 표현을 썼다.

 독일 튀링겐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교육개발연구원 김창환 교육통계본부장은 “분단 직후 서독의 교육은 서독 정부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통일은 서독 주도로 달성될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동독 체제를 비하하고, 서독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하지만 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엔 동독에 대한 객관적 정보 제공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72년 조약 체결 전 디스터벡 출판사의 사회교과서에 있던 “동독에선 보통 강제 선거를 한다”는 내용도 “찬반투표를 한다”로 바뀌었다. “동독의 헌법은 이름만 민주주의적…사이비…모순적”이란 표현도 있었으나 삭제됐다.

 ②지역·정파 초월한 통일 교육=76년 가을, 보수와 진보 등 정치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서독의 정치교육학자들이 독일 남부 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 모였다. 며칠을 논쟁한 끝에 이들은 “특정 견해의 강제 주입을 금지하고, 논쟁이 되는 부분은 교육 현장에서 논쟁하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탄생이었다. 통일 교육을 포함한 정치 교육에서 교육자들 사이에 공통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최소한의 합의(minimaler Konsens)’였다.

 78년 11월 23일엔 서독 11개 주의 문화교육부 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일 문제(통일)에 관한 교육지침서’를 발표했다. 국가 수준의 교육 문제를 정하는 문교부 장관들의 상설협의체 KMK(Kultusminister Konferenz·한국의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격) 회의 결과였다. 이들은 통일 교육이 더 이상 주별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데 공감하고,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지역과 정파를 초월한 합의였다. 지침서는 불과 20쪽 남짓한 얇은 문서였다. 이 안에 민족·역사적 차원에서 통일의 당위성을 제시했다. 시작하는 글에선 “독일 문제는 모든 학교의 수업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밝혔다. 이어 실제 학교 수업에서 유의할 점으로 ▶독일 문제는 동시에 유럽 문제다 ▶국경선 양쪽 독일인들은 공통의 역사·언어·문화로 결속돼 있다 ▶(동·서독 간) 정치적 이해의 대립은 합법이다 ▶지리교과에서는 동구권 옛 독일 지역의 특징도 다뤄야 한다는 점 등을 규정했다.

 성취 목표도 설정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학생들은 독일이 분단국가임과 베를린이 옛 수도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김진숙 연구위원은 “분단 이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서 사라진 ‘하나였던 시절’을 교육을 통해 상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라며 “지침서는 특히 동·서독이 원래 한 민족, 한 국가였던 점을 학생들이 느끼도록 감성적인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③베를린장벽으로의 수학여행 장려=지침서엔 ‘베를린으로의 수학여행, 가능하다면 동베를린과 동독 방문을 권고한다’고도 돼 있다. 이후 81년10월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와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정상회담에서 청소년 교류 활성화 문제를 제기했다. 82년엔 동·서독 청소년단체가 관련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에게 1인당 하루에 5서독마르크(DM, 현재 가치로 약 1만5000원)씩 체류비용도 지원했다.

 통일연구원 손기웅 감사실장은 “서독 학생들은 너무 다른 동독 을 보고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반면 서독으로 보내진 동독 청소년들은 발전된 서독을 보며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했고, 이 중 일부가 베를린 장벽 붕괴 때 주인공으로 나섰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영종 통일전문기자, 최익재·정용수·전수진·유지혜·현일훈·안효성·서재준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통일문화연구소 고수석 연구위원, 정영교 연구원, 영상=조문규·김성룡·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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