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美대학 '백인學' 잇단 개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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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달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밀워키) 그레고리 제이(영문학) 교수의 강의장. 제이 교수는 학생 10여명을 불러내 일렬횡대로 세운 뒤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수퍼마켓 매장에서 직원이 자신의 뒤를 따라다닌 적이 없는 사람만 앞으로 한 걸음 나가세요", "부모가 은행 대출이나 계좌개설과 관련,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만 또 한 걸음"….

처음엔 폭소가 나왔지만 지시가 거듭되면서 이내 교실 안의 웃음기는 가셨다. 백인학생들만 자꾸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고 흑인.아시안.히스패닉계의 학생들은 뒤에 처졌기 때문이다. 한 흑인학생은 아예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교수는 백인학생들에게 뒤돌아 보게 한 뒤 어떤 기분인지 한 단어로 말해보라고 했다.

"미안해요(Sorry)."

이날 과목은 최근 미국 대학에서 앞다퉈 신설되고 있는 '백인학'(Whiteness Study)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앞서 보여준 것은 '특권 걷기'(Privilege Walk)라는 백인학의 전형적인 교과과정이다. "백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과 혜택을 받는지를 깨닫게 하고, 인종차별문제를 백인들의 시혜적 관점에서 탈피해 객관적으로 비교.분석하려는 목적"이라고 제이 교수는 말했다.

그는 또 "그 동안 미국 학계에서 흑인.중동.아시안 등 수많은 인종.국적별 연구가 있었음에도 정작 백인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백인은 정상적인 데 반해 소수계는 뭔가 특별하고 비정상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인종들이 백인과 어떻게 다른지만 보았지, 백인이 다른 인종과 어떻게 다른지는 안 보려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인학의 효시는 1980년대 말 일리노이대 교수인 데이비드 로우디거(사학)가 "백인을 빼놓고 인종차별문제에 말할 수 없다"며 '화이트니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강좌를 첫 개설한 것이다. 92년 흑인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의 "백인은 흑인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부터 들여다 봐라"고 외친 게 기폭제가 됐다. 이후 사회학.문화인류학 분야의 많은 백인 교수들이 과목 개설에 나섰다.

현재 미국 내 백인학 강좌는 프린스턴.매사추세츠주립.캘리포니아주립.일리노이주립대 등 70곳 정도며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브라운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의무적으로 '백인학'강좌를 듣게 하고 있으며, 전문 싱크탱크(백인문화연구소)까지 설립했다. 하지만 백인학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흑인학이나 중국학.한국학에서는 모두 좋은 것만 가르치면서 왜 유독 백인학에서는 백인을 나쁘게만 가르치느냐. 이는 학계에 포진한 진보.좌파세력들이 개발한 새로운 무기"(방송평론가 러시 림보), "학문적이라기보다 정치성이 너무 짙다"(헤리티지재단 풀너 총재)는 지적들이 잇따르고 있다. 워싱턴 지역의 모 교수는 올해 백인학을 개설하려다 학교 경영진의 압력으로 결국 포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백인문화연구소 제프 히치콕 소장은 "백인이라는 개념은 정작 유럽에는 없고 미국에서만 통용된다. 과거 아일랜드계.독일계 식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백인'이라는 신(新)인종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학문적 의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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