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여보, 말 조심 좀 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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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살림집인 청와대 관저엔 세명의 요리사(한.중.일식)가 출근을 한다.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는 대통령의 밥을 차려주지 않는다. 대통령의 식단은 영양분의 과학적 균형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복잡한 검식(檢食) 문제도 걸려 있다. 盧대통령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전속 코디네이터.미용사가 맡는다. '평범한 아내'로서 權여사의 역할은 넥타이 고를 때의 조언과 관저를 나서는 盧대통령 배웅 정도로 보인다.

젊을 때 盧대통령은 權여사에게 고생을 시켰다. 고향집 맞은편 산중턱에 토담집을 짓고 盧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할 때 權여사는 매일 점심 보따리를 날랐다.

權여사가 데리고 온 세살배기 신걸이(아들 건호씨의 옛날 이름)의 재롱, 시험이 임박해 權여사가 마늘을 듬뿍 넣어 고아온 삼계탕을 盧대통령은 "귀한 추억"이라고 했다.

盧대통령의 權여사에 대한 인간적 신뢰는 대단한 것 같다. 대선 전 지지율이 바닥일 때 盧대통령은 "마누라는 내가 꼭 대통령이 될거라고 했다"며 "사법시험 합격, 국회의원 당선 때도 그랬다"고 했다. 의지력의 원천인 셈이다. 청와대 입성 후 '인생의 동반자'인 權여사는 盧대통령의 무엇이 되어 있을까.

盧대통령이 관저로 퇴근하면 權여사는 바깥일엔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연이(딸)가 일 잘한다고 (근무처인 영국대사관에서) 보너스를 받았대요" "며느리가 얼마나 살갑게 하는지…"라며 주변얘기를 주로 꺼낸다. 친근한 농담도 잦다. "행사 때 입은 내 옷 어땠어요"(權여사), "오늘은 괜찮더라"(盧대통령), "평생 옷 한벌 안 사준 양반이…"(權여사)식이다.

2주에 한번꼴로 관저를 찾아오는 건호.정연씨 내외와 식사할 때도 "몸가짐 조심하라"는 신신당부 외엔 자녀들 신혼 이야기가 주종이다. 그래서 盧대통령 일가에 붙여진 주변의 별명은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즐거운 가족'이다.

대통령부인으로서 공식활동도 盧대통령의 역할을 조용히 보완하는 선이다. 지난달 權여사가 대통령 방미를 수행했던 대기업 대표의 부인 28명을 청와대에 초청했다. 盧대통령이 시간을 못 내 대신 감사를 표시한 자리다. 그러나 서로 초면이고 權여사도 그런 자리가 익숙하지 못해서인지 분위기는 좀 썰렁했다고 한다.

늘 낙천적이고 조용한 權여사가 최근 盧대통령을 매섭게 다그친 사건이 있었다. 權여사는 "말로 인해 스스로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다"는 보도를 들어 盧대통령 말의 품격 문제 등을 지적했다고 한다.

盧대통령이 "크게 잘못된 게 있느냐"고 하자 權여사는 다시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그 사람들의 지적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며 "권위주의야 버려야 하지만 스스로 권위를 낮추는 표현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며 단호히 설득했다고 한다. 盧대통령은 이후 한 행사에서 "내가 말이 좀 거칠다는데 앞으로는 다듬어 나가겠다"고 했다.

權여사는 오전엔 관저에서 전 일간지를 꼼꼼히 읽는다. 스크랩도 한다고 한다. '민심의 전달자'라는 權여사의 또다른 역할에 새로운 기대가 가는 대목이다.

최훈 청와대 출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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