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달밤 개인훈련 하던 기성용, 다시 독기 품다

중앙일보

입력

2006년 9월 늦은 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프로축구 FC서울 훈련장. 17세 청년이 가로등 밑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슈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문을 갔다가 훈련장에 잠깐 들렀던 한웅수 당시 서울 단장(현 프로축구연맹 총장)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옆에 있던 경비원은 "밤에는 훈련장 조명등을 켜지 않는데도 저 청년은 매일 개인훈련을 한다. 참 독한 친구"라고 말했다. 경비원이 말한 청년은 바로 기성용(26·스완지시티)이었다.

기성용이 달밤 개인훈련을 한 이유가 있었다. 신인 기성용(1989년 1월생)은 당시 서울 동료였던 이청용(27·크리스탈팰리스)·고요한(27·서울)·고명진(27·알 라이안)의 그늘에 가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기성용은 그 해 7월29일 전남과의 리그컵 경기 교체명단에 포함돼 몸을 열심히 풀었다. 이미 서울의 리그컵 우승이 확정돼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벤치를 지키던 후보 선수들도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 차례로 이름이 불렸지만 끝내 기성용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기성용은 아버지(기영옥 현 광주FC 단장)에게 "축구장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고 말한 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기성용의 집념은 변함이 없다. 기성용은 27일 영국 웨일스 리버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웨스트브로미치와 2015-2016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8라운드에서 전반 9분 결승골을 터뜨려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 시즌 기성용은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골(8골)을 터뜨렸고, 스완지시티의 '올해의 선수' 에 선정됐다. 그 덕분에 지난 여름엔 잉글랜드 아스널과 이탈리아 유벤투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용은 스완지시티와 4년 계약을 맺고 의리를 지켰다. 올 시즌 주전 미드필더로 나섰지만 골이 없었다. 스완지시티는 이날 경기 전까지 2개월 동안 7경기 연속 무승(2무5패)에 그친 상태였다. 지난 10일 게리 몽크(36)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10일 "기성용이 지난 시즌 보여줬던 뛰어난 활약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했다. 기성용도 지난 22일 "팀이 18위에 그쳐 나 자신에게 화가난다"고 자책했다.

기성용은 다시 독기를 품었다. 이날 경기에서 스완지시티 앙헬 랑엘이 전반 9분 때린 중거리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흘러나오자 포기하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들어 오른발로 볼을 골문 안쪽으로 차넣었다. 집념의 골이었다. 스완지시티는 83일 만에 승리하면서 16위(4승6무8패)로 올라섰다. 기성용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아름다운 골은 아니지만 내게는 의미있는 골" 이라고 말했다.

기성용은 지난 2009년 거칠기로 악명 높은 스코틀랜드 리그의 셀틱FC에 입단했다. 닐 레넌 당시 셀틱 감독은 기성용에게 주전자리를 약속했지만 말을 바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친 기영옥 단장은 27일 "당시 성용이가 두 차례나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해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강하게 어필했다. 수비력을 키워 결국 주전을 꿰찼다"고 말했다. 2012년 이적료 600만 파운드(약 104억원)에 스완지시티로 이적한 기성용의 기량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 기 단장은 "성용이가 과거엔 볼을 예쁘게 찼다. 하지만 영국축구는 압박이 심하다. 힘과 스피드를 지닌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롤모델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 우승을 이끈 지네딘 지단(43·프랑스)을 꼽았던 기성용은 최근 이탈리아 출신 티아고 모타(33·프랑스 파리생제르맹)를 교과서로 삼고 있다. 기성용은 모타처럼 수비 때는 포백을 지원하고, 공격을 할 때는 과감하게 상대 진영에 침투한다.

20대 초반까지만해도 그는 천방지축이었다. 2013년 7월 SNS에 대표팀 감독을 비난한 게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배우 한혜진(34)씨와 결혼하고, 지난 9월13일 딸 시온이를 얻은 뒤 그라운드에서도 한층 성숙해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기영옥 단장은 "성용이가 이제 책임질 사람이 두 명(아내, 아이)으로 늘었다. 26일 시온이 100일을 맞아 한국에서 며느리, 아기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성용이가 '아기 탄생 100일을 맞아 골도 넣고, 팀도 이겨서 기쁘다'고 하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축구팬들은 "기성용이 '분유 파워'까지 장착하면서 더욱 강해졌다"고 말했다. 아이 분유값을 벌기 위해 더 열심히 뛴다는 의미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