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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산책

영적인 성숙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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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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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며칠 전 서울 조계사 앞을 지나다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을 한 큰 등이 눈에 띄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천주교·기독교 성직자 분들과 함께 조계사 스님들이 트리에 점등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막상 그 불빛을 마주하니 참으로 아름답고 보기 좋았다. 종교는 다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절에서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는 현수막이라든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자주 볼 수 있게 돼 볼 때마다 마음이 정겹고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종교가 다르다고 경계하고 다투는 것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며 사는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다.

왕자로 태어나 모든 걸 버리고 수행 떠난 부처님도 좋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 약자의 편에 선 예수님에도 감동받는다

 내가 출가하기 전 학생이었을 때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 종교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바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법정 스님이 회주로 계시던 길상사 개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해주셨던 자애하신 모습이다. 그 다음 해에는 법정 스님께서 명동성당의 강연 청을 수락해 가톨릭 신자들 앞에서 강연을 해주셨던 모습이 또 기억난다.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께서 교류하시는 모습은 나와 같은 후대 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어 가슴속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사실 성직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은 종교적 프레임이 좀 달라도 읽어보면 서로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나만 하더라도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나 조정민 목사님의 잠언집을 즐겨 읽는데, 특히 조정민 목사님의 『사람이 선물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은 내 마음을 크게 두드렸다.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남편을 바꾸어놓겠다고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를 바꾸어놓고 말겠다고 매를 들었고, 쉰이 가까워진 지금, 바꾸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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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가만히 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져 간다는 것은 바로 조정민 목사님 말씀처럼 남들이 문제라고 쉽게 손가락질하는 것에서 시작해 본인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요즘 시쳇말로 중2병에 걸린 아이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불만의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남들을 문제라고 보는 내 마음 자체도 문제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때문에 남을 도우려는 마음,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도 ‘우월한 나의 옳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부인 ‘완벽하지 않은 나’라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 역시 문제가 많은 세상의 일부일 뿐이지 그 밖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평소에 발견하는 영적 성숙의 모습은 언어를 아는 것을 가지고 그 본질을 경험했다고 착각하지 않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라든지 ‘불성’이라든지 말은 많이 들어 알지만, 그 말이 지칭하는 내용을 직접 경험한 이는 많지 않다. ‘모름’이라는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에서 출발해야지, 그 언어를 안다는 이유로 대상 자체도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며 자신하는 것은 아직 성숙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종교 간의 사상적 다툼을 보면 종교적 상징 뒤에 있는 내용이 서로 충돌하기보다는 상징이나 언어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과 ‘애플’이라는 말이 서로 우월하다고 싸우고 있다면 그 본질 자체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안타깝겠는가? 종교적 상징을 뛰어넘어 본질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 다른 모습도 있지만 공통적인 모습도 상당히 많다.

 마지막으로 성숙이라는 것은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억누르거나 심지어 부정하고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생하는 공존의 길을 찾아 실천하는 것에 있다. 나와 정치적 견해와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그들을 폭력적으로 누르거나 제거하려 하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을뿐더러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그런 나를 비난할 뿐이고, 실제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또 다른 적들이 우리 안에서 곧 만들어진다. 세상은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어떻게 보면 싫어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나와 다른 한쪽을 없애려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지혜롭다.

 왕자로 태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자의 길을 떠나셨던 부처님도 좋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 세상의 약자 편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도 나는 감동받는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계신 분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신 그 모습이 놀랍고도 모범이 되지 않는가? 오늘 모처럼 조정민 목사님의 모습도 뵐 겸 교회에 가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같이 축하드리고 싶다.

혜민 스님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