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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긴축의 역설…허리띠 졸라맸더니 포퓰리스트 득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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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독일의 주변국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의 33년 양당 체제를 무너뜨리고 제3당으로 올라선 스페인의 신생 좌파 정당 포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의 21일(현지시간) 선언이다.

그는 “유럽에 보내는 우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주권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라고 했다. 독일 주도의 긴축 정책에 반기를 든 게다.

낯익은 메시지다. 지난 1월 그리스에서도 1975년 민주화 이후 40년 동안 이어진 중도 우파-좌파 연정 체제가 막을 내리고 처음으로 급진 좌파인 시리자가 집권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당시 “그리스는 5년간 치욕과 고통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외쳤다.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번 스페인 총선을 두고 “긴축이 스페인에서도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논평했다.

치프라스가 집권했듯 포데모스도 집권 가능성이 있다. 사회당의 연정 파트너로서다. 국민당(PP)이 350석 중 123석을 차지했지만 과반 의석을 만들만한 마땅한 파트너가 없다. 신생 우파 정당 시우다다노스(Ciudadanos, 시민들)는 연정 가능성을 배제했다. 사회당(PSOE)이 90석이지만 포데모스(69석)와 군소 정당들(28석)과 연대하면 연정 구성이 가능하다. 영국 가디언은 “포데모스가 참여하는 사회당 연정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유사한 상황이 한 달 전 포르투갈에서 벌어졌다. 파수스 코엘류 당시 총리가 이끄는 중도 우파 정부가 4.2%포인트 차로 1당이 됐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선 “강력한 긴축 정책에도 승리했다”고 반색했다. 하지만 이들의 재집권은 11일에 불과했다. 반(反)긴축을 앞세운 좌파 연대의 힘 때문이다. 중도 좌파인 사회당(PS)과 급진 좌파 정당 좌익블록, 공산당·녹색당이 힘을 합했다. 현 총리는 안토니우 코스타 사회당 대표다. 이들은 긴축 정책 기조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2008년 유럽 재정 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남유럽에서 정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나마 이탈리아의 중도 좌파 성향인 마테오 렌치 총리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동유럽의 모범생이던 폴란드의 시민강령도 10월 실각했다. 프랑스에서도 반긴축, 반이민을 내세운 국민전선(FN)의 상승세가 프랑스 정치 지형을 흔들고 있다.

스페인의 정치학자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위기는 분명 경제 위기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긴축 정책이 남유럽을 도왔는지 여부에 대해선 지도자와 경제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하다. 긴축의 후폭풍이 기성 정치권에 균열을 가져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렌치 총리는 이런 분석에 힘을 실었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의 긴축 정책이 (반긴축) 포퓰리스트의 불길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성장 없이 혹독한 정책을 추진해 온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었다. 폴란드·그리스·포르투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이제 스페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자”고 말했다.

물론 반긴축을 내세운 정당이 집권한다고 반긴축 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독일 등 압박에 치프라스가 백기 투항한 게 그 예다. 포르투갈의 사회당 연정도 재정 건전성 약속은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긴축에 대한 저항감이 유럽 정치의 변화를 일구고 있다. 렌치 총리는 “포퓰리즘이나 무관심, 민중 선동을 패배시키려면 (긴축이 아닌) 성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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