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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배운 이상민 “이젠 어떤 팀과 붙어도 자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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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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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데 익숙했던 서울 삼성이 1년 만에 이기는 데 익숙한 팀이 됐다. 이상민 감독의 표정도 1년 사이에 많이 변했다. 지난해 데뷔전에서 패해 표정이 굳어 있던(흑백 사진) 이 감독은 올 시즌 공동 3위를 달리며 웃는 날이 많아졌다. [중앙포토]

‘울면 안 돼, 이상민’.

시련 이긴 2년차 감독의 도전
지도자 첫 해 11승 43패 꼴찌 수모
‘모 아니면 도’ 내 성격 아는 서장훈
작년 사퇴하려 할 때 옆에서 위로

 지난해 12월25일자 중앙일보 스포츠면 기사 제목이다. 이상민(43) 감독이 이끄는 프로농구 서울 삼성은 지난해 12월23일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54점 차)를 당했다. 당시 삼성은 7승23패 꼴찌였다.

 선수 시절 ‘컴퓨터 가드’로 이름을 날리며 챔피언결정전에 7차례나 진출했던 이상민 감독. 그러나 초보 감독에게 지난 시즌은 악몽과도 같았다. 전력 보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했다. 농구팬들은 “꼴찌팀 감독은 63빌딩 외벽청소, 1050m 땅속 탄광에서 석탄캐기, 10㎏ 굴 까기 못지 않은 극한 직업”이라며 안쓰러워했다.

 그로부터 딱 1년이 흘렀다. 지는 데 익숙했던 삼성이 올 시즌엔 이기는 데 익숙한 팀으로 변모했다. 삼성은 지난 20일 전자랜드를 꺾고 5연승을 달렸다. 삼성의 5연승은 지난 2013년 11월 이후 2년 1개월만이다. 지난 시즌 11승(43패)로 꼴찌에 그쳤던 삼성은 올 시즌 벌써 19승(13패)을 거두면서 공동 3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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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독은 인터뷰 요청을 고사했다. “좋은 성적은 선수들 덕분”이라며 “나 대신 김준일(23)과 임동섭(25)을 만나면 안되겠느냐”고 버텼다. 우여곡절 끝에 21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난 이 감독은 “지난 시즌은 참 힘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후 그렇게 많이 져본 적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또 “감독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이 엄청났다”면서도 “기자들에게 ‘선수들을 비난하는 대신 날 비난해달라’고 요청했다. 선수들에게는 ‘지더라도 고개 숙이지 말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다독였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 연패 후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면서 사퇴를 결심한 적도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놨다. 그러나 연세대 시절 코치 유재학(53) 모비스 감독과 후배 서장훈(41)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이 감독은 “지난해 장훈이가 ‘그렉 포포비치(미국프로농구 샌안토니오를 이끌고 5차례 우승을 이끈 명장)가 삼성을 맡아도 힘들 것’이라며 위로해줬다. 장훈이는 ‘모 아니면 도’ 인 내 성격을 잘 안다. 내가 포기하고 그만둘까봐 진심으로 걱정해줬다”고 말했다. 1999-2000시즌 신세계에서 꼴찌를 했지만 모비스에서 프로농구 최다우승(5회) 지도자로 거듭난 유재학 감독은 “누구나 아픔과 함께 성장한다. (이 감독에게) 주위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농구를 찾으라는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걸까 고민을 많이 했다. 밑바닥 농구인생을 통해 많이 배웠다”면서 “경기가 끝날 때마다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다. 더 떨어질 곳이 없으니 다시 도전하는 자세로 임하자고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올 시즌 삼성은 지난 시즌 모비스의 우승을 이끈 리카르도 라틀리프(26·미국)와 문태영(37)을 영입했다. 베테랑 가드 주희정(38)도 데려왔다. 이 감독은 “김준일 정도를 제외하면 선수단이 거의 싹 바뀌었다. 창단 후 최대위기 상황에서 선수단 전면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주장 문태영이 선수단 사기 진작을 위해 사비를 털어 돈을 건 뒤 하프라인슛 내기를 한다. 1977년생 주희정은 야간운동을 자청한다. 박훈근·이규섭·양은성 코치도 큰 도움을 준다”고 선수들과 코치들을 칭찬했다.

 농구인들은 이 감독이 지도자 2년차에 접어들어 농구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고 평가한다. 지난 10일엔 가드 론 하워드(1m88cm) 대신 ‘언더 사이즈 빅맨(신장이 크지 않지만 센터급 선수)’ 에릭 와이즈(1m92cm)로 외국인 선수를 교체했다. 발가락 수술을 딛고 500여일 만에 복귀한 장신 슈터 임동섭(1m98cm)에게 이 감독은 “자신있게 3점슛을 쏘라”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에는 이길 수 있는 경기도 지곤 했는데, 올 시즌엔 어느 팀을 만나도 질 것 같지 않다. 현역 시절 현대에서 조니 맥도웰(1m94cm·미국)과 함께 뛸 때도 10점 넘게 지고 있어도 질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한 골밑을 가진 팀이 결국 승리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상민은 골밑을 장악한 맥도웰과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1997년부터 현대의 정규시즌 3연속 1위를 이끌었다. 올 시즌 라틀리프(1m99cm)와 문태영(1m94cm)의 가세로 제공권이 향상 된 삼성은 팀 리바운드 2위(37.1개)다. 그는 또 “주위에서는 매 경기 접전을 펼치는 삼성 경기가 재미있다고 하지만 정작 난 피가 마른다”면서 “선수들이 날 들었다놨다한다. 눈 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왔다”며 웃었다.

  삼성은 지난 17일 무려 1437일 만에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전 23연패에서 탈출했다. 이 감독은 “경기 전 선수들에게 ‘모비스전 23연패는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니 부담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유 감독님이 경기 후 ‘축하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등을 두드려주셨다”며 “모비스전의 묵은 때를 벗어버린 뒤 선수들이 자신감이 더 생겼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삼성 코치 시절 6연승을 해봤다. 주위에서 요즘 상승세라면 삼성도 우승후보라고 말씀하시더라. 일단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뒤 한 발 한 발 올라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서울 라이벌’ SK에 졌다. ‘올해는 다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이 감독은 “KCC전 작전구상을 해야죠”라고 답했다. 삼성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 KCC와 경기를 치른다.

용인=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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