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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웅의 오 마이 미디어] 미국 시청자는 즐겁다! 우리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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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방송 플랫폼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시청자의 행위는 물론 프로그램 제작관행이 변하고 있다. 특히 오리지날 시리즈, 즉 시즌제 드라마와 코미디를 고품질로 제작해서 다각도로 수익을 내는 방식이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렇다는 게 아니다. 미국 이야기다.

넷플릭스와 아마존과 같은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빠르게 성장 중이다. 젊은 시청자들은 케이블과 같은 유료방송을 해지하고 인터넷으로 간다. 이 때문에 전통적 방송사업자는 딜레마에 빠진다. 당장 스트리밍 서비스에 방영권을 팔아서 이익을 챙길 수 있지만, 이는 결국 시청자가 유료방송을 해지할 이유를 주는 셈이다. 만약 방영권을 팔지 않고 버틴다면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압박은 되겠지만 대신 제작비 회수가 어렵다.

광고수입과 방영권 판매수입을 놓고 고민하던 방송사업자들은 프로그램 제작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고품질 드라마와 코미디를 제작해서 승부하는 방식이다.

결과는 오리지날 시리즈의 폭증이다. 2015년 시즌에만 미국에서 총 409개의 새로운 시리즈가 제작됐다. 6년 전과 비교해서 2배 가까이 증가한 숫자다. 이 중에 넷플릭스와 아마존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자체 발주한 드라마나 코미디도 44개에 달한다. 이들도 고품질 프로그램을 손에 들고 있어야 다른 프로그램을 사들일 때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오리지날 시리즈 제작에 열을 올린다.

플랫폼 경쟁으로 시리즈 수만 증가한 게 아니다. 내용도 변한다. 드라마를 예로 들자면 과거에는 일상적 세계관과 통속적 설정 속에서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반복되면서 느리게 사건이 진행하는 ‘시리얼(Serial)’ 류가 많았다. 예컨대 '로 앤 오더'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비현실적 세계관이나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등장인물을 몰아붙이는 전개가 대세다.

사정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방송 제작자들이 한 시즌에 22회 에피소드로 약 4년은 방송해야 성공이라 생각했다. 88회 이상 에피소드를 보유해야 재방송할 수 있는 판권을 다른 방송사에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4년 이상 끌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제는 다르다.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빠르게 시청률 승부도 내야하고, 정확하게 어떤 시청자 집단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재방, 스트리밍, 해외 판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다.

플랫폼 경쟁 때문에 방송사업자는 피가 마르겠지만 미국 시청자는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 고품질 드라마와 코미디를 언제 어디서나 골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방송산업 전체로 봐서도 좋은 일이다. 경쟁으로 단련한 제작능력과 판매전략을 활용해서 착실하게 세계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방송환경에서도 플랫폼 간 경쟁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그러나 이 경쟁으로 프로그램 제작이 양적으로 증가하고, 내용에 혁신이 일어나고, 프로그램 방영권 판매가 다변화하는 선순환 효과가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프로그램 품질로 승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고품질 프로그램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가치를 실현할 전략이 있는지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업자는 물론 정책당국의 사려깊은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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