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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백악관의 사진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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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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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1999년 백악관 크리스마스 파티장에 선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의 미소가 환하다. 함께 포즈를 취한 제임스 로건 공화당 의원 부부의 표정도 밝다. 사진만 봐서는 절친하기 그지없는 단짝 같지만 100% 연출이다. 클린턴 부부와 로건 의원은 질긴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이기 때문이다. 98년 클린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반(反)클린턴 연대의 리더 격이었던 이가 로건 의원이다. 로건의 주도하에 하원 탄핵소추팀은 클린턴을 끈질기게 몰아붙였다. 클린턴에게 로건은 꿈에 나올까 무서운 인물이었을 터다.

 그런 로건 의원을 클린턴은 백악관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했다. 탄핵 정국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이다. 로건 의원도 초청장을 휴지통에 넣는 대신 나비넥타이를 매고 백악관으로 향했다. 과거는 덮고 클린턴은 “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로건은 이후 한 인터뷰에서 “탄핵 정국의 불화가 풀리는 듯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클린턴은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포용의 아이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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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로건(맨 오른쪽) 공화당 의원이 1999년 백악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 맨 왼쪽은 제임스 로건 의원의 부인이다. [백악관 홈페이지]

 클린턴뿐 아니라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포토 세션은 중요한 연례행사다. 백악관식 사진 정치다. 여야 상·하원 의원들을 초청해 그들과 일일이 따로 사진을 찍으며 짧게나마 대화를 나눈다. 수백 명의 손님들을 이렇게 응대하려면 3시간 정도 서 있는 건 기본이라서 백악관 비서진은 대통령이 서는 자리 밑에 푹신한 요를 깔아놓는 등의 조치를 궁리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럼에도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을 이렇게 벌 세우는 전통이 이어지는 이유는 이것이 소통의 기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이 크리스마스 포토 세션을 “사진 한 장 그 이상의 가치”라고 평했다.

 우린 어떤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정치는 불통의 장이 된 것 같다. “속이 타 들어 간다”며 국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대통령도, “정치가 싫다”는 제1야당 대표도 소통의 방식은 일방통행 일색이다. 불통의 정치를 보는 국민의 속도 타 들어 가고 정치가 싫어질 지경이다. 미워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악수라도 하며 체온을 전하면 나으련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열흘 남짓 후면 누구나 한 살 더 먹는다. 내년엔 좀 나아지려나. 백악관 크리스마스 파티처럼, 대통령과 여야가 두루 만나 하루쯤은 환한 표정으로 새해 떡국 한 그릇 나누는 장면을 보고 싶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