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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떨쳐낸 한글세대, 문지와 함께 역사를 건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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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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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을 맞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창립 주역인 평론가 김병익(왼쪽)씨와 김주연씨. 두 사람의 손때가 밴 책들이 뒤편 서가에 가득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들이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의 소설책들에 감수성을 빚졌다. 당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나 최인훈의 『광장』을 읽는 일은 단순히 문학작품을 읽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읽는 일이었다. 시는 어떤가. 최승자·이성복·황지우 등 한국 시사(詩史)에 빛날 이름들의 문지 시집을 읽으며 사람들은 시대의 가파른 현실을 가늠하곤 했다. 뿐인가. 문지는 계간지 ‘문학과지성’(지금의 문학과사회)과 함께 당시 지성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비판의식을 일깨우는 일종의 지식 공급책,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문학과지성사 40돌
창립 멤버 김병익·김주연 대담

일제·전쟁상처 극복 숙제 안고
젊은이들 지적 갈증 해소 역할
모더니즘의 체제 저항성 중시
창비보다 먼저 좌파이론 소개

 그런 문지가 최근 출판사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75년 12월 12일이 생일이다. 출판사의 모태인 계간 문지의 창간은 그보다 5년 전인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현·김치수씨와 함께 문지 창간의 ‘네 주역’ 중 절반인 문학평론가 김병익(77)씨와 김주연(74)씨를 15일 만났다. 옛날은 화려했지만 요즘 문지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다. 문학출판 명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비평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팩트’처럼 돼 버린, 문학침체가 주요 원인이라면 문지만 탓할 일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문학위기 시대에 문학과 문지의 미래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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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의 네 주역인 4K. 왼쪽부터 김현·김치수·김병익·김주연씨. 1972년 사진.

 - 흔히 초창기 네 명의 주역을 가리켜 ‘문지 4K’라고 부른다. 호칭의 유래가 궁금한데.

 ▶김병익(이하 병)=우리가 스스로 붙인 것 같지는 않은데….

 ▶김주연(이하 연)=1972년 네 명이 한국문학 최초의 공동비평서인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을 민음사에서 냈다. 주간한국 잡지에서 우리 넷을 모아 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사에서 아마 처음으로 4K라는 말을 쓴 것 같다.

 - 계간지와 출판사를 연달아 설립할 당시, 어떤 시대상황이었나.

 ▶병=계간지가 창간된 1970년은 해방 후 한 세대 가량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일제 잔재 청산과 한국전쟁 상처의 극복이라는 숙제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4·19 혁명으로 인한 민주화의 희망, 곧 닥친 5·16 군사정변으로 절망을 잇따라 체험한, 일종의 갈림길에 선 상황이었다. 계획 경제로 사는 건 나아졌지만 농촌이 쪼그라들고, 자본주의의 폐해도 나타나던 시기다. 어느 시대 문학이나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당시 한국문학은 어떻게 전근대에서 근대로, 한문세대에서 한글세대 문학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시대적 요구가 1966년 창작과비평에 이어 4년 뒤 문학과지성의 창간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연=당시 정신적·지적 풍토는 전근대적 취락사회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패배주의와 비합리적인 샤머니즘이 지배적이었다. 당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속에서 지적 갈증 같은 것을 심하게 느꼈던 것 같다. 돌아보니 문지가 그런 걸 해소해줬던 것 같고….

 -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를 꼽는다면.

 ▶병=자화자찬이나 과장이 될지 모르겠는데, 진보적인 사회과학 이론을 가장 먼저 수입·소개한 게 실은 문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이니 마르크스니 하는 단어들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던 70년대 후반,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위험 서적’들을 잇따라 출간했다. 좌파 이론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 당시 지식사회의 인식을 넓히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유신 시대의 정치적·정신적 억압 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일정 정도 열었다고 자부한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의 편집동인 체제를 계간지에 도입해 정착시킨 것도 성과로 꼽고 싶다. 민주적인 공론장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잡지 지면에 반영했다.

 ▶연=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베스트셀러이면서 스테디셀러인 작품들을 상당수 세상에 내놓은 점도 성과다. 일정한 문학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적 발언을 마다하지 않는 성숙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문지의 소설들은 창비의 리얼리즘 계열에 비교하면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이 많은데, 모더니즘에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힘이 있다고 봤다.

 - 모더니즘과 저항성이 어떻게 연결되나.

 ▶연=이론적으로 복잡한 얘기다. 간단히 말해,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이 한 에세이에서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성’을 얘기한 것처럼 정치적 참여를 외면하는 것도 정치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태도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병=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움만으로도 악을 순화하고 퇴치하는 기능이 있다고 답하겠다. 이념적으로 어떤 입장이냐를 떠나서 그런 특성이 문학의 근본적 힘이라고 믿고 실천해 왔다.

 - 문학 위기설은 이제 진부할 정도다.

 ▶병=다른 사람보다 더 비관적인지 모르겠지만 문학의 미래는 암담하다 . 영상·디지털 문화에 밀려 갈수록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굳이 문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사를 다루는 서사(敍事)의 영역은 어떻게든 존재하겠지.

 ▶연= 당장은 위기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희망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 된다 해도 대체 불가능한 예술이나 체능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더구나 문학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섬세하게 다룬다.

 - 문지의 침체도 심각한 것 같은데.

 ▶병=작가들이 문지로 데뷔해 문학적 평가를 받은 다음 창비에서 책을 내 사회적 태도를 인정 받은 후 마지막으로 문학동네에서 책을 내 돈을 번다는 농담이 있다. 한 작가가 여러 출판사를 옮겨다니며 책을 내는 현상은 유독 우리나라가 심한 편이다. 외국에서는 한 작가가 꾸준히 한 출판사에서만 책을 내며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뿐더러, 작가와 출판사의 인연이 깊을 경우 힘센 출판사의 문학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권력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면 사고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문학권력만 집중적으로 바라봐서는 결국 문학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문학권력이라고 지적하는, 작가와 출판사 간의 긍정적인 관계마저 해체하고 나면 무엇이 좋은 문학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연=성숙한 작가는 하나의 세계이고, 자연스럽게 문화적 권위를 얻는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한 출판사에서 성장해 수준 높은 작품을 쓰려 하지 않고, 평평하고 넓게 이름만 퍼지는 걸 추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 자주 쓰이는 ‘갑을 관계’를 문학에도 대입해 말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의미 있는 발언을 꺼릴 수밖에 없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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