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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0. 新여성-욕망이냐 현모양처냐(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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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화의 격변기에는 '신(新)'자가 유행합니다. 서양식 근대화의 도입과 함께 등장한 '신(新)여성'의 새로움이 과연 무엇이고 그 새로움이 전통적 여성상과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연재를 통해 서로 대립적 시각을 견지하며 비판의 날을 세워왔던 박노자-허동현 두 교수가 신여성의 역사에 대해선 흥미롭게도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흔히 전통적 여성상으로 알고 있는 '현모양처'를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점에서 두 교수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교수가 욕망과 자유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신여성의 저항정신을 높이 사고 있는 데 반해, 허교수는 전문성과 직업에 대한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신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의 준거 틀로 인식됐던 빅토리안 시대(1837~1901)의 영국을 한번 볼까요? 영국의 귀족층이나 부유한 중산층의 성인 남성들은 겉으로는 '자제의 도덕'을 들먹였지만, 막상 자신들은 고급 포르노그라피나 에로틱 문학을 열람하고 고급 매춘부의 '서비스'를 비싼 값에 이용하는 등, 성적 욕망을 충족하는 데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류층 사람들의 매매춘 행위는 '전염병 방지법'과 같은 국가 위생기구의 통제를 받거나, 교회나 자선가들의 지탄을 받았지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나 이러한 '욕망의 피라미드'의 기본 틀은 근대 조선에도 그대로 이식된 듯합니다. 당시 중류 이상의 성인 남성들이 요정에서 '조선 미인도감'이나 권번의 '초일기(草日記)' 등과 같은 유혹적인 사진을 즐겨 보고 기생을 불러 노는 것은 결코 어렵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직업을 구하지 못한 대학 졸업생, 이른바 고등 실업자들도 스스로를 중류 남성 사회의 소속원이라 느꼈기에 유곽에 들락거리는 것을 다반사로 삼았습니다.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1934)에서 법률 책을 저당잡혀 술집과 유곽을 전전하던 무직 인텔리들을 기억하십니까?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1922)의 주인공 '이인화' 역시 카페 여성들을 희롱하는 것이 특기였지요.

이처럼 개화기와 일제시대 상류층 사람들이 '절지(折枝:'꽃 꺾기'- 기생 부르는 일의 별칭)'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누렸던 데 비해, 연령.성별, 그리고 사회.경제적 조건 상 피라미드의 하부에 위치한 이들은 맹목적인 '자제.정숙.정조'를 강요당하였습니다.

'황성신문'에서 조혼(早婚) 근절을 주장하며 제시했던 주요한 근거 중 하나가, '규문의 일(10대 부부의 성관계)'로 남성의 지기(志氣)가 박약해져 민족을 위한 영웅.사업가나 학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조혼의 폐해', 1909년).

이때 여성들에게는 "정결과 정조를 늘 지켜라""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 근대적 학식을 익혀 민족 영웅이 될 사내 아이를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라"('대한매일신보', '여자 교육에 대한 의론',1909년)와 같은 요구가 한층 더 강력해졌지요. 한국 전통 에로스의 진수인 '춘향전'을 '음탕 교과서'(이해조, '자유종', 1910)로 매도할 만큼 빅토리안적인 정숙과 자제가 절대시된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교육받은 대다수의 '신여성'들 역시,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현모양처'라는 말의 성차별적 가치관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보통 신여성이라 하면 '사회 활동가'를 떠올리지만, 공산당 지도자와 결혼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이들(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최창익의 부인 허정숙)이나, 아예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활동을 펼친 김활란 등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여성들은, 남편을 보필하여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성은 호탕해도 좋지만 여성은 정조를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것이지요.

그러한 배경을 염두에 둘 때, 유부남 애인과의 동반자살(1926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프라노 가수이자 여배우인 윤심덕(尹心悳), 그리고 '이혼 고백장'(1934년)을 통해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무책임한 애인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요구하여 합의금을 받아낸 화가이자 문필가인 나혜석(羅蕙錫)은 진정한 '영웅'으로 보입니다.

굳이 영웅이란 표현을 쓴 것은, 여성들의 욕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 초기 사회에서, 이 두 명의 조선 여인은 개인적 불행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말 용감하게 욕망 실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다 갔기 때문입니다.

윤심덕은 젊은 나이에 죽고 나혜석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무의탁 폐인 생활을 몇 년 이어가다 세상을 떠났지만, 둘 다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체제의 압력에는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암울했던 시대 여성들의 진정한 몸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반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설명 전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이 그린 ‘자화상’(60x48cm, 1930년대). 대표적 신여성의 한명으로 꼽히는 나혜석의 세련된 의상과 외모가 전반적으로 어두운 배경과 맞물리며, 마치 식민지와 남성의 지배에 맞선 신여성의 내면적 갈등을 표출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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