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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범죄 '아군의 폭격' 피해 느는데 24년 동안 정식 조사는 한 건도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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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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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일 새벽 2시. 아프가니스탄 쿤두즈에 위치한 한 외상치료 전문 병원이 폭격당했다. 쿤두즈는 지난 9월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 정부군과 탈레반 사이의 교전이 격렬하게 이뤄지는 곳이다. 응급실, 물리치료 병동 등 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병원 본관을 노린 듯한 공습은 한 시간 동안 계속됐다. 병원을 운영하는 국경없는의사회는 미군과 아프간군 측에 폭격 중단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세계 속으로] 국경없는의사회 잇따른 피폭 논란 # # 의사회 "전쟁도 규칙 있다" 규명 요청 # 미군 "피할 수 있었던 실수" 오폭 인정 # # 중동 지역 민간인 희생 최소화 실패 # 가디언 "집·학교·결혼식장 가장 위험" # # 희생자들 위로금도 턱없이 부족 # NYT "민간인 목숨 푼돈으로 취급"

이 병원에서 일하는 헝가리 출신 간호사 라조스 졸탄 예치는 동료 의료진과 환자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중환자 6명이 병상에 누운 채 불에 타는 등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사고 직후 부상을 입은 의료진은 서로에게 수술을 해야만 했다. 결국 병원 직원 14명과 환자 16명 등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 공습은 국경없는의사회가 1971년 발족된 이후 단일 공습으로는 가장 많은 생명을 잃은 사고였다.

피폭 이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희생된 의료진과 시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전면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발표했지만 국제사회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군의 오폭으로 민간인이 숨지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인도주의적 지원 단체에 대한 폭격은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국제법에 실수라는 것은 없다. 전쟁에도 규칙은 있다”며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지난달 말 미국 정부는 “비극적이지만 피할 수 있었던 인간적 실수에 의한 사고였다”며 오폭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당장 공격을 멈추지 않은 이유’를 묻자 미군은 “사건 당시 쿤두즈의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이 5일 밤낮을 쉬지 않고 전투를 했다”며 군인들이 피곤했다는 맥락에 주목해 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이와 같은 오폭을 ‘아군의 폭격(Friendly Fire)’이라는 관용어로 표현한다. 적이 아닌 친구를 쏜다는 것이다. 아프간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서는 매년 미군 등 외국 군들의 오판으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전쟁 범죄(war crime)’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쿤두즈 병원 폭격 이후에도 예멘과 시리아에서는 크고 작은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는 이슬람국가(IS) 공습에 나선 러시아 정부군이 시리아 두마 지역의 한 시장을 로켓으로 공격해 주민 70명이 죽고 550여 명이 부상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외국 군들은 중동 지역에서 숱한 오류를 저지르며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며 “전쟁을 피해 주민들이 모여 있는 집과 학교, 결혼식장이 역으로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고 지적했다.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8월 제네바협약을 체결했다. 무력 충돌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협약의 골자다. 민간인 거주지역에서는 백린탄을 쓰거나 조명·연막탄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환자들과 의료진·의료시설 등 분쟁 지역에서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제네바협약은 91년 구성된 국제인도주의 사실조사위원회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국제인도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곳으로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한 76개국 가운데 한 나라에서 조사를 요청하고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조사가 진행된 적은 없다.

오폭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금은 턱없이 적다. 뉴욕타임스는 아프간 쿤두즈의 국경없는의사회 병원 오폭 사고 이후 미국 정부의 위로금 정책에 대해 “민간인들의 목숨을 푼돈으로 취급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지역의 민간인 오인 공격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금은 현지 경제 수준과 비교해서도 턱없이 부족하다. 2007년 3월 아프가니스탄의 75세 노인과 16세 소녀를 숨지게 한 미군은 두 사람 가족에게 각각 2000달러의 위로금을 건넸다. 앞서 2002년 미군이 아프간 우루즈간주의 결혼식장을 폭격해 30명이 숨졌을 때는 가구당 200달러를 줬다. 2009년 아프간 카불에서 주민 15명이 사살됐을 때 미군은 마을 복구비로 1500달러를 지급하며 “부수적인 피해가 있었다면 미안한 일”이라고 발언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군인들이 전쟁 중 현지에 거주하는 주민들,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의 희생을 ‘부수적인 피해’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S-BOX] 코펜스 한국사무총장 "정부 지원은 한 푼도 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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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코펜스(왼쪽 사진) 국경없는의사회 신임 한국사무총장은 지난 1일 인터뷰에서 “전쟁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은 물론 이들을 돕는 의료진도 여전히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부임한 코펜스 사무총장은 13년간 국경없는의사회의 10여 개국 활동 현장과 유럽 본부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2013년부터는 국경없는의사회 레바논 현장 책임자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의료 활동을 이끌어왔다. 다음은 코펜스 사무총장과의 일문일답.

-아프가니스탄 쿤두즈의 병원이 공습당한 이후에도 비슷한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시리아 북부에서 의료 시설 6곳이 공격을 받았고 이 중 3곳은 문을 닫아야 했다. 쿤두즈 병원이 피폭된 이후 인근 주민 수십만 명은 아무런 의료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피해는 현지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구호 활동가들의 안전이 실시간으로 위협받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분쟁을 벌이는 정부군과 반군 등에게 병원의 GPS 좌표를 알려주는 등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위험한 현장에서는 우리의 단체명과 깃발을 분명하게 내걸고 있다. 의료진과 직원들도 쉽게 신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분쟁 당사자들은 의료시설을 존중하지 않는다.”

-미국 국방부가 아프간 쿤두즈의 병원 재건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국경없는의사회는 이를 거부했다.

“특정 정부의 외교 홍보를 위해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위해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지켜온 정책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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