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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미얀마] 미얀마 변화의 4가지 키워드

중앙일보

입력

한국인에게 미얀마는 먼 나라다. 동남아시아에 있지만 오랜 군부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로 심리적 거리가 멀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지 여사 이름은 알아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미얀마는 한국과 닮았다. 식민지 역사, 군부 독재, 민주화 항쟁, 지정학적 중요성, 인구 규모, 뜨거운 교육열까지 닮았다. 미얀마가 한국을 주목하고 한국이 미얀마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달 총선 직후 미얀마 양곤을 찾아 미얀마의 변화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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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여사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우 냔윈 NLD 당중앙위원회 위원. 사진=정원엽 기자

“모두 선거 승리만 묻고 50년 이상 군부 치하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역사였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에서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만난 우 냔윈 당중앙위원회(CEC) 위원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아니라 ‘역사’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총선(11월 8일)승리가 53년간 쌓여온 군부 독재의 모순 때문이라는 말이다. 반면 같은 날 만난 집권여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의 우 띤윈 위원은 “미얀마 국부(國父)인 아웅산 장군의 아우라에 졌다”며 “부족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과도한 평가로 몰표가 나왔다”고 선거 패배 이유를 분석했다. 과연 변화의 출발점인 25년만의 자유총선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군부 부정부패와 민주화 열망

미얀마는 1948년 1월 영국에서 독립했다. 독립 1년을 앞두고 지도자였던 아웅산 장군을 잃었다. 1962년 네 윈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군부 독재는 53년간 이어졌다. 군부는 64년 산업시설 국유화라는 어설픈 사회주의 실험으로 미얀마 경제를 나락에 빠뜨렸다. 민간기업과 땅이 모두 국가소유로 넘어갔고 언론도 사라졌다. 서양곤기술대 김흥국 교수는 “독립 직후 미얀마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비옥한 토지로 동남아에서 제2의 경제대국이었지만 군부 정권이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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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 인근 흘라잉타르가 지역의 빈민가. 사진=정원엽 기자

군부 독재 시절 ‘크로니(crony)’라는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며 국민의 삶이 열악해졌다. 군부 회사 2~3개가 미얀마 경제의 60%를 좌우하는 가운데 국민의 80%가 빈민으로 전락했다. 미얀마의 1인당 국민소득(GNI)는 1인당 1200달러(128만원)로 월 평균 소득이 10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서민들로부터 50~60만원대 월세를 받는다. 김 교수는 “불평등이 변화에 대한 갈망을 불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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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8항쟁 당시 양곤의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이라와디 아카이브]

미얀마에도 민주화 기회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88년 8월 8일 있었던 ‘8888 항쟁’이다. 당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은 군부에 의해 강제 진압됐고 시민 3000여명이 사망했다. 시민이 흘린 피로 독재자 네윈이 퇴진했지만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90년 첫 자유총선에서 NLD가 82%의 득표로 승리했지만 군부가 결과를 무효로 돌렸다. 이후 25년만에 자유 총선에서 민주화 열망이 다시 분출했다. 해외 거주하는 미얀마 국민들은 ‘플라이 투 보트(Fly to Vote)’ 운동을 벌이며 비행기를 타고 와서 투표했고, 빈민들도 생업을 접고 고향으로 가 투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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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으로 돌아가 투표하는 '플라이 투 보트' 운동에 참여한 미얀마 국민들. [페이스북 캡처]

◇아버지의 아우라와 ‘아메 수’

미얀마 시민들의 투표 열기는 대단했다. 선관위에 따르면 투표율은 80%였고, 이중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가 79.4%를 얻었다. USDP는 300석 가량의 의석을 잃었다. 25%의 군부 지명 의석(116석)에도 한참 못미치는 42석에 그쳤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수지 여사가 있었다. 양곤에 거주하는 카잉카잉(24ㆍ여)은 “선거 직후 양곤 전역에 ‘아메 수’가 울려 퍼졌다”고 말했다. 아메 수는 미얀마어로 ‘우리 어머니 수지’라는 뜻이다. 빈민가 흘라잉타르에서 만난 아웅 저 뗏(36)씨도 “정책은 잘 모르지만 ‘아메 수’를 믿고 투표했다”고 말했다. USDP쪽에서 ‘묻지마 투표’였다는 불만이 나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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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짓고 있는 NLD 당사. 오른편 현 당사 주차장에 아웅산 장군과 수지여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정원엽 기자

수지 여사의 인기는 아버지인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에 대한 존경과, 14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버틴 수지의 신념에 기인한다. 20년 이상 수지여사 집에서 집사로 일해왔다는 우 민 수(64)는 “군부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나의 정치적 구심점이었다”며 “외부에선 대통령 위에(above the President) 서겠다는 수지 여사의 말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수지 여사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보라색 손가락 혁명

양곤에서 인상 깊었던 건 신문과 스마트폰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신문을, 젊은 층은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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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총선 소식을 다룬 미얀마 현지 영자지 미얀마 타임스. 사진=정원엽 기자

이런 변화는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2013년 테인 세인 대통령이 50년간의 족쇄를 풀고 민간 언론을 허용했고, 국영통신사 MPT가 독점하던 통신시장을 개방하며 스마트폰 보급이 확대됐다. 과거 유심(USIM)카드 하나가 2000달러(200만원)을 넘던 것이 외국 통신사가 들어오며 3달러 수준으로 하락했다. 덕분에 지난해 휴대폰 사용자는 5년만에 15배 이상 늘었고 지난 분기에는 전세계 4번째로 휴대폰 사용자가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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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라온 보라색 손가락 인증샷. [페이스북 캡처]

이번 선거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바람을 탔다. 선거 직후 페이스북에는 보라색 인주를 찍은 손가락을 ‘인증샷’으로 올리는 열풍이 불었다. 준꼬 꼬 륀(28)은 “투표 인증샷이 경쟁적으로 올라오며 선거 분위기가 고조됐고 결과적으로 투표율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USDP측에서도 “SNS를 간과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거 관련 정보나 정치적 의견 유통이 SNS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도로건설, 전기제공, 의료지원 같은 여당의 전통적 선심정책으로 지지율을 높이려던 USDP의 전략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군부가 감시하기 힘든 새로운 ‘광장’을 놓친 것이다.

◇미ㆍ중 이해 충돌로 인한 힘의 공백

아무리 국민의 열망이 높아도 총칼을 넘기는 힘들다. 1990년 군부의 선거결과 무효화가 이를 증명한다. 이번 총선 압승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이유다. 하지만 군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바로 외부로부터의 더 강한 힘이다. 2010년 이후 군부가 개혁개방의 길로 나선 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영향이 컸다. 전 양곤경제대 부총장 레이찌 미얀마통계협회장은 “경제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군부로선 가난한 내수시장으로는 부를 충당하기 힘들었다”며 “국제사회 제재를 풀기 위해 군부도 미국 등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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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국경을 접한 미얀마. 인도양과 연결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는 동남아 지역의 지정학적 요충지다. 위로는 중국과 긴 국경을 접하고 있고 아래로는 인도양과 연결되어 있다. 중국이 파키스탄~미얀마~방글라데시 등 인도양 주변 국가에 항만을 건설해 중동에서 남중국해까지 이어지는 거점을 연결하는 ‘진주목걸이 전략’을 완성하기 위해 놓쳐서 안되는 곳이 미얀마다. 때문에 중국은 군부정권을 지지하며 오랜 시간 미얀마에 공을 들여왔다. 미국 입장에서도 미얀마는 놓쳐서는 안 된다. 아시아재균형 정책에서 중국의 확장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라서다. 인도는 낙후된 북부 개발을 위해, 일본은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포스트이자, 새로운 동남아 생산기지로 미얀마를 필요로 한다.

강신원 순천대 교수(한ㆍ미얀마 연구회장)는 “이번 선거가 무사히 치러진 이면에는 강대국들의 상호견제가 있었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테인 세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고, 시진핑 중국 주석이 아웅산 수지 여사를 만난 건 강대국들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강대국들의 강력한 이권이 걸린 상황에서 미국 주도로 미얀마의 ‘민주화’가 지지를 받았고, 미얀마를 끌어들이기 위한 중국ㆍ일본 ‘투자’가 이뤄지며 미얀마가 정치ㆍ경제 부문에서 자율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셈이다.

선거는 끝났다. 수지 여사도 “비교적 공정한 선거였다”고 평가했다. 이제 남은 건 숙제다. 열강의 전략적 충돌 속에서 법치 확립 등 실질적 민주화 확립과 경제개발 등 과제가 남았다. 우 냔민 NLD 위원은 “자유가 충만하고 독립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NLD의 꿈”이라고 했다. 미얀마에 봄이 오고 꿈이 이뤄질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양곤=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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