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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굿바이, ‘미스터 민주주의’ Y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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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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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논설주간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추웠던 그 겨울의 지리산이 떠올랐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7년 1월 12일 새벽, YS는 참모들과 함께 남원의 여관에서 출발해 지리산 뱀사골을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과 3주 전인 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정부 여당이 진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신념에서 내각제를 주장한다면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놓았다.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고 화답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섰던 신민당 고문 YS는 정치공작을 의심했다. YS의 지리산행은 독재정권과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60세의 YS는 가장 앞에서 길을 헤쳐나갔고, 상당수가 낙오했다. 힘겨워 주저앉으려 하자 민주산악회원이 “얼어죽는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YS는 회고록에서 “10m 앞이 보이지 않는 폭설 속에서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뱀사골 산장까지 올랐다”고 기록했다. 나는 산장에서 “불의의 세력과 싸울 용기를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를 취재수첩에 적었다. YS는 석 달 뒤 현역 의원 90명 중 상도동계 40명, 동교동계 34명 등 74명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해 그해 5월 김대중(DJ)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6월항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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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통령 퇴임 이후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생애 전체를 돌이켜 보면 과(過)보다는 공(功)이 훨씬 더 많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연약한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목숨을 걸고 싸웠다. 5·16 쿠데타 세력이 민정 불참 선언을 뒤집고 군정을 4년간 연장하겠다고 제의하자 반대 시위를 벌여 구속되고(63년), 박정희의 3선개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 초산 테러를 당했다(69년). 신민당 총재로 미국 방문 도중 박정희의 유신 선포 소식을 들은 뒤 “새로운 쿠데타”라면서 즉시 귀국해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다(72년). 뉴욕타임스 도쿄특파원 스톡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독재정권인 박정희를 택할 것인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를 택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가 의원직을 제명당했고(79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화를 요구하며 생명을 건 23일간의 단식을 했다(83년).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극한투쟁의 연속이었다.

 집권을 위해 3당 합당으로 호남 대 비호남의 비극적 지역구도를 만들었고, 경제 실정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한 과오는 있었지만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율곡사업 감사, 역사 바로세우기로 4·19, 12·12, 5·18 재규정, 금융실명제 도입 등 일련의 개혁조치는 민주주의의 차원을 높인 무혈혁명이었다. 서거를 계기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던 DJ와 YS가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박정희의 산업화 성공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양김을 통해 역사의 균형을 바로잡은 우리 국민의 집단적 판단력이 놀라울 뿐이다.

 양김의 부재(不在)를 실감하면서 영원한 신화로 남게 될 두 사람이 앞장서 성취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지금 민주주의는 마치 물이나 공기 같은 공유(共有)의 자원이 됐고, 사유물처럼 각별히 아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애초에 목숨 걸고 싸워야 지킬 수 있는 연약한 싹에 불과했고, 결코 공짜가 아니었음을 양김은 치열한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YS는 79년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응하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은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를 통해 우리 정부를 선택할 자유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전란 중 이마누엘 칸트를 졸업논문으로 썼던 철학도의 순수함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졌던 것이다.

 YS는 28년 전 지리산을 오르면서 “나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웠다”고 했다. 오늘을 사는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라고. YS는 정공법으로 불의와 맞섰지만 왜소해진 오늘의 정치인들은 그저 나 살 궁리만 하고 있다. 시대적 과제는 산적한데 해결할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YS는 회고록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했어야 할 우리 언론들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심지어는 보도조차 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83년의 단식도 ‘정세 흐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가십 기사로 다루면서 반달곰 밀렵사건을 1면 톱으로 올렸다고 한탄했다. 지리산의 눈보라에 몸을 맡긴 28년 전 YS의 산행은 진실을 알릴 길 없어 선택한 의사표현 방법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고 미안함을 느낀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빈손으로 세상과 작별한 ‘미스터 민주주의’ YS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