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고부 사이 현명한 남편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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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까지 고민하는 15년 차 남편) 결혼 15년 차 남편입니다. 2년 차 명절 때 아내는 제가 외출한 사이 제 어머니와 여동생 둘에 둘러싸여 게으르다느니, 집안일을 잘 못한다느니 등의 구박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내 마음에는 그때의 미움이 남아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내가 잘못했다’ ‘다 잊고 용서해라’는 사과를 자주 했고,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화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명절이 되어 고향으로 가려고 하면 항상 억지로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평소에 집에서 시댁 이야기만 꺼내면 아내는 짜증 섞인 말투로 변합니다. 최근엔 모친이 암 투병으로 쇠약한 상태인데도 새집을 구경하러 오겠다고 하니 아내는 대놓고 “안 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또 회사에서 주최하는 2박 3일짜리 가족 캠프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자고 했더니 본인은 안 갈 테니 아이들과 부모님만 모시고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했더니 아내는 가기 싫답니다. 그리고 아직 용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와 계속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힘이 듭니다.
 

아내에겐 충분한 위로를, 어머니에겐 애인 같은 친구 역할을

아내의 불만에 토 달지 마라

A(결혼 초기 대응 중요하다는 윤 교수) 오늘 사연을 요약하면 결혼 초기 시어머니와 시누이 구박에 아내가 상처를 받았고 십 년이 지나도 그 앙금이 남아 있어 시어머니를 불편해하고 잘 모시지 않아 속상하다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니가 “내가 잘못했다, 모든 걸 잊고 용서해라”고까지 했는데 계속 그 분을 풀지 않는 아내가 너무한 것 같다 이야기했는데요. 그런데 사과의 심리 반응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걸 잊고 용서해라 같은 말은 좋은 사과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체가 나이기 때문이죠. 내가 용서를 구했으니 너는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용서하기 싫은데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니 더 짜증이 날 수도 있죠. 왜 용서하고 말고 하는 내 자유까지 침범하는가 하는 불편한 감정 반응이 생길 수 있는 거죠. 미워하기만 하면 편한데 용서하지 못하면 미안한 마음까지 들게 되니 시어머니를 더 회피하게 됩니다.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존재이니깐요.

 이런 고부 갈등에 따른 관계의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결혼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그때 대충 넘어가게 되면 오늘 사연처럼 앙금이 길게 남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아무래도 며느리가 을입니다. 그래서 고부 갈등에서 아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 남편이 충분히 아내를 위로해야 합니다. 여기서 ‘충분히’는 남편 입장에서 ‘충분히’가 아니라 아내가 충분히 느낄 때까지입니다. 위로할 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내의 불평이 내 입장에선 다소 틀리게 느껴지더라도 토 달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긍하며 시간을 충분히 내서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성은 대화를 통해 내 감정이 어떤지 정리하고 또 상대방이 내 감정을 얼마나 이해하는가를 느끼는 것이 대화의 주된 목적입니다. 정보 습득이나 논리적 설득보다 상대방이 나를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죠. 남편이 나를 충분히 공감해준다고 느끼면 마음의 상처도 흉터로 남지 않습니다. 새살이 돋아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연처럼 10년의 시간이 지나 속상한 감정이 흉터로 남아 버리면 하루아침에 그 마음을 치료하고 바꾸는 게 어렵습니다. 억지로 급하게 그 마음을 돌려놓는 것보다 아내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모든 걸 잊고 나를 용서해달라 했어도 아직 아내 마음이 그렇지 않은데, ‘어르신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너도 다 털고 관계 개선을 해라’고 말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마음은 논리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내도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하는 마음에 미안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 미안함이 시어머니에 대한 섭섭함을 넘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어머니를 잘 모시려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비난하면 미안한 감정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벌을 받았기 때문이죠. 당분간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어머니와 따로 데이트해라

고부 갈등을 야기하는 시어머니-아들-며느리의 삼각관계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남편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사랑에 대한 뇌과학 연구를 보면 엄마의 자식 사랑과 남녀 간의 사랑이 뇌 안에서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랑이 아니라 같은 사랑이라는 거죠. 물론 남녀 간의 사랑엔 열정적 사랑이 더 크고 부모와 자식 간에는 헌신적 사랑이 더 크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없겠죠.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은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모든 사랑을 쏟은 아들에게 보상 심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도요. 아들을 결혼시키는 건 부모에게 중요한 숙제라 결혼식까지는 질투 같은 것이 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내 곁을 공식적으로 떠나는 순간 보상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내 소중한 남자를 노력도 없이 데려가는 젊은 여자한테 강한 질투심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아들에게 며느리가 예쁜 짓을 해도 밉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질투는 무시무시한 감정이니까요.

 물론 고부 갈등 없이 잘 지내는 분들도 계시죠. 그러나 무의식엔 이런 요소들이 어느 정도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것이 ‘빈 둥지 증후군’입니다. 아기새가 떠난 빈 둥지에 혼자 남아 있는 어미새처럼 마음이 외롭습니다. 취미나 다른 사회적 활동, 관계를 충분히 만들어 놓지 않을수록 텅 빈 마음은 더 크게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마저 친밀하지 않다면 허전함의 강도는 더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로서의 역할을 계속 놓지 않으려는 본능이 작동하고, 그러다 보면 아들을 돌보는 새로운 대상인 며느리에게 엄한 직장 상사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른바 고부 갈등이 시작되는 거죠. 고부 갈등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며느리에 대한 미움 같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은 엄마로서의 상실감과 허전함입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생깁니다.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고부 갈등이 며느리 마음을 잃게 하고, 결국은 아들도 지치게 해서 아들의 마음도 얻지 못하니 허전함이 더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고부 갈등이 있을 때 아들의 역할은 엄마와 아내 간의 중재가 아니라 엄마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애인 같은 친구 역할을, 바쁘겠지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엄마에 대한 제일 좋은 효도일 수도 있죠. 고부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억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만나는 회식이나 여행을 만드는 것은 노력보다 갈등만 더 키우기 쉽습니다. 먼저 아내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한 후에 아내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면 어머니와 데이트 시간을 가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어머니와 데이트를 하는 겁니다. 가능하면 취미 활동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독립적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습니다.

 ‘돈 벌기도 바쁜데 언제 아내 위로하고 어머니와 데이트하느냐’ ‘힘들다’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자를 잘 사랑하는 데에는 시간의 절대량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정말 사랑하면 시간을 내는 것이 남자라는 것을 여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참 무서웠던 아버지 … 지금도 화내는 사람만 보면 떨려요
눈물도 공감도 노동이다, 때론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학창시절 나처럼 아이도 왕따 될까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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