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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통했다, 마법 같은 역주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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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0년 만에 통했다, 마법 같은 역주행

흥행 실패로 수입사를 문 닫게 할 뻔한 영화가 10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2005년 개봉 이후 10년 만에 재개봉해 뒤늦게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터널 선샤인’(11월 5일 재개봉, 미셸 공드리 감독) 이야기다. 개봉 18일째인 23일 현재 관객 20만 명을 돌파했다. 첫 개봉 당시의 관객 수(17만 명)를 추월한 재개봉작은 ‘이터널 선샤인’이 처음이다. 올해 재개봉 영화 중 최고의 흥행 성적인 것은 물론이다. 이전까지 부동의 1위였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월 5일 재개봉,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339개 스크린에서 관객 15만 명을 모았다. ‘이터널 선샤인’의 재개봉 스크린은 그 3분의 1에 불과한 108개. 첫 개봉 당시 외면받은 영화의 놀라운 명예 회복이다. 재개봉을 주도한 배급사 노바미디어의 주원주 대표는“재개봉 영화라고 모두 이런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 자체의 힘이 컸다”고 강조한다. 10년 전의 천덕꾸러기가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저력은 무엇일까. 이른바 ‘서칭 포 극장 판권’을 방불케 했던 극적인 재개봉 성사 뒷이야기도 추적했다.

‘이터널 선샤인’은 뒤늦게야 입소문이 났다. 21세기 독보적인 시네아스트 미셸 공드리 감독이 각본가 찰리 카우프먼과 만든 판타지 멜로다.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 제거 회사’에 찾아가지만 기억이 사라질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독특한 스토리로 2005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처음 국내에 소개될 때만 해도 난해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게다가 미셸 공드리는 아직 한국 관객에겐 낯선 감독이었다. 코미디 배우로 익숙한 짐 캐리의 웃음기 지운 연기 역시 당시 대중에게는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영화의 진가는 10년 사이 서서히 증명됐다. 주원주 대표는 “배우·가수 등 분야를 떠나 100명에 가까운 명사가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 영감을 받은 영화로 꼽았을 정도다. 지나간 사랑과 연애의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로 자리매김했는데, 그렇다면 일반 관객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터널 선샤인’을 ‘인생 영화’로 꼽는 20~30대가 적지 않다. OST, 블루레이도 나오기만 하면 완판됐다. ‘이터널 선샤인’의 단독 상영을 추진한 CGV 최승호 프로그래머가 재개봉을 주목한 이유다.

최 프로그래머는 “멀티플렉스가 성숙하기 이전에 개봉해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이 많고, 케이블 TV 노출도 적은 영화들이 있다”며 “극장의 주요 관객층이 45세 이하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봉한 지 10~20년 된 영화가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주걸륜 감독)과 ‘러브레터’(1995, 이와이 슌지 감독) 등 여성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재개봉에 성공했다”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터널 선샤인’이야말로 재개봉으로 흥행할 가능성이 컸다”고 말했다.

극장 판권을 갖고 있던 씨맥스 픽쳐스는 ‘이터널 선샤인’의 실패 이후 영화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주 대표는 수소문 끝에 판권의 행방을 알아냈다. 대개 판권 계약은 10년 주기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2018년까지 13년 동안 계약 돼 있었다. 배급사 측은 첫 개봉 때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재개봉을 주저하는 씨맥스 픽쳐스 측을 적극 설득했다. 6월부터 CGV와 재개봉을 추진하며, 영화 속 겨울 바다가 인상적인 점과 첫 개봉 날짜가 2005년 11월 10일인 점을 감안해 재개봉 시기를 11월로 정했다.

첫 재개봉 고지는 9월 21일. ‘고아라, 공효진, 김민희, 류승범, 박진영, 서강준, 혁오 등 스타들이 사랑하는 단골 영화’라는 점을 내세웠고 밴드 혁오가 ‘이터널 선샤인’에 영감을 받은 자작곡 ‘공드리’를 소개했다. 영화의 획기적인 소재에 마케팅 초점을 맞춘 10년 전 개봉 당시와 달리, 이번엔 팬들이 기억하는 명장면, 명대사 등 감성적인 자극에 주력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화 홍보를 맡은 올댓시네마 김태주 실장은 “재개봉 고지가 나간 다음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온라인 상에서 파장이 컸다. 지난 10년간 이어져 온 입소문이 한 번에 화력을 발휘한 것 같다”며 “시기적으로 좋은 멜로영화가 없어 득을 본 영향도 없지 않다”고 풀이했다. 인기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10점 만점을 줬다는 사실도 유효했다. 영화 관람 후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라이브톡은 10월 27일, 예매 오픈 3분 만에 매진됐다.

개봉 전 반응을 기민하게 살펴 ‘판’을 키운 전략도 적중했다. 올해 5월 먼저 비슷한 규모로 개봉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염두에 두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96개 스크린을 확보해 관객 5만7000여 명을 동원했다. ‘이터널 선샤인’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넘어서는 것을 기준으로 잡아 상영관 규모를 키웠다. 통상 재개봉은 30~40개 관 규모인데 ‘이터널 선샤인’은 56개 관(스크린 수 91개)으로 출발했다. 최 프로그래머는 “개봉 전 예매율과 온라인 반응이 좋아 판을 키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개봉 당일 5일 다양성 1위로 출발한 ‘이터널 선샤인’은 이틀 만에 관객 2만 명을 돌파했다. 개봉 둘째 주 주말엔 다양성 영화를 넘어 전체 박스오피스 4위로 흥행 순위를 역주행했으며, 상영관을 68개로 확장하면서 10년 전 개봉 당시 성적마저 추월했다. 김 실장은 “기존 재개봉작과 달리 재관람객뿐 아니라 20~30대 새로운 관객의 호기심을 부추긴 마케팅이 흥행 몰이로 연결됐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선 “가뜩이나 부족한 예술 영화관에서 재개봉 영화가 신작을 밀어낸다”는 불만도 나온다. 하지만 아트나인 정상진 대표는 “이미 한 주에 10~20편씩 개봉작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은 철저히 경쟁 논리로 적용된다. 좋은 영화가 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1월 19일 재개봉한 빔 벤더스 감독의 쿠바 음악 다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을 비롯해 ‘렛 미 인’(2008,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호소다 마모루 감독), ‘쇼생크 탈출’(1994,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등 내년까지 재개봉 라인업이 잇따른다. 제2의 ‘이터널 선샤인’은 탄생할 수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 열풍이 재개봉작 흥행 열풍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15 재개봉 영화 흥행 TOP 5>

제목 재개봉일│재개봉 관객 수(명)│스크린 수(개)

1 이터널 선샤인(2004) 11월 5일│20만671│108
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2월 5일│15만7175│339
3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5월 7일│5만6551│96
4 포켓몬 레인저와 바다의 왕자 마나피(2006) 7월 22일│3만9469│257
5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4월 9일│1만6524│31

<‘이터널 선샤인’ 개봉부터 재개봉까지>

2005년 11월 10일
● 국내 첫 개봉

2015년 6월
● 배급사 노바미디어 & CJ CGV, 10주년 기념 재개봉 추진.
● 수입사 씨맥스 픽쳐스가 보유한 극장 판권 2018년 만료 사실 확인.

9월 21일
● 재개봉 확정 고지 및 2종 포스터 공개
● SNS 뜩운 반응. 개봉 예정 영화 검색 순위 6위 등극.

10월 20~30일
● 윤종신·유희열이 '이터널 선샤인' 콜라보 음원 & 뮤직비디오 공개.
● 밴드 혁오가 헌정곡 '공드리' 콜라보 뮤직비디오 공개.
● 촬영 현장 스틸 및 미셸 공드리 감독 제작 노트 공개.

11월 3~5일
● 다시 보는 명장면 영상 공개.

11월 5일
● 10주년 기념 재개봉.
●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
● 11월 6일, 개봉 2일 만에 관객 20,000명 돌파.

글=나원정·김효은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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