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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 과 '과'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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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난 그분을 잘 안다. 멀찌감치 볼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남동생과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 고등학교 동문회 야유회에 갔을 때다.

서울 변두리인지 경기도 어디인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고등학교 시절 야구선수였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동문 체육 모임엔 항상 글러브를 끼고 필드에 나가셨다. 야유회에는 아버지 친구들과 선후배 아저씨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행사 도중 단상에 한 분이 나오더니 그를 중심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나와 남동생은 그때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엔 야당 지도자의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고 그를 따르는 동문들은 만세삼창을 부르며 환호했다.

김영삼이 한국정치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됐을 때였다. 그 다음 김영삼 대통령을 본 것은 93년도 그의 미국 방문 때다. 군사정부의 구태를 완전히 벗은 문민정부라는 이미지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물론 LA한인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간지 신참기자였던 나는 김 대통령의 방미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신문사에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취재하는 팀의 막내 노릇을 했다. 저녁시간 때에 김 대통령이 묵고 있던 센추리시티 호텔에 차를 갖다 대고 김 대통령이 나오면 쫓아간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대기하고 있었다. 밖은 그를 반대하는 소수의 시위대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날 김 대통령의 일정은 별다른 것이 없었고 나는 회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고 선배와 함께 퇴근했다. 다음 날엔 LA시청을 방문한 김 대통령을 취재하러 가기도 했다. 또한 김 대통령이 항의시위대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자 그의 이런 모습이 미화돼서 기사에 나가기도 했다.

김 대통령이 한 식당에 들렀을 때 앉은 의자와 밥그릇과 수저가 전시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고 모든 신문의 기사가 김 대통령을 찬양(?)하기 일색이었다. 나도 결국 그 일에 한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후 김 대통령은 아들의 부정부패 사건과 IMF로 끝도 없이 추락을 했다. 그후 그에 대한 평가는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김영삼 대통령이야말로 긍정적으로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김영삼 행정부처럼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북한과 일본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는 정치집단이 지금 한국에는 없다.

한편으로 김 대통령은 3당합당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는 잡았지만 그 영향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한국의 개혁세력이 분열되고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부산 경남과 수도권 강남 지역의 온건 개혁세력이 변질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과연 그의 3당 합당이 옳았던 것일까라는 대답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정치인을 평가함에 있어 공과 과의 양면은 모두 고려돼야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 바른 평가도 내려질 수가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김윤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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