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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 샴페인의 귀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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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호 26면

1962년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최근 개봉한 ‘007 스펙터’까지, 53년간 총 24편이 제작돼 영화 역사상 최장수 시리즈를 기록한 ‘007’ 시리즈. 1대 숀 코너리부터 6대 다니엘 크레이그까지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바뀌었지만 007만의 상징적인 요소들은 여전하다. 시작부터 관객의 심장을 조준하는 ‘건 배럴 신(Gun Barrel Scene·총구를 상징하는 중앙의 원으로 걸어오던 제임스 본드가 갑자기 몸을 돌려 정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과 본드 걸, 본드 카, 최신형 무기, Q와 M 등등. 그리고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본드의 술인 마티니와 샴페인이 있다. 특히 007 시리즈와 샴페인 브랜드 볼렝저(Bollinger)와의 인연은 22편 중 총 14편에 등장할 만큼 각별하다.

최근 ‘스펙터’ 개봉에 맞춰 출시한 ‘볼렝저 스펙터 리미티드 에디션’

브로콜리와 볼렝저 가문의 우정 007시리즈를 만든 제작 프로듀서 앨버트 로몰로 브로콜리(Albert R. Broccoli)는 1968년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위해 어떤 술을 등장시키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중 볼렝저 패밀리를 만나게 된다. 이후 영국인이 사랑하는 캐릭터 제임스 본드와 영국 왕실이 사랑하는 최고급 프랑스 샴페인 볼렝저는 14편의 영화 속에서 ‘제임스 본드의 샴페인’이라는 매력적인 상징물을 탄생시킨다.


흥미로운 건 브로콜리와 볼렝저 두 가문의 이 밀월관계가 산업사회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PPL 광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영화 속에서 ‘대놓고’ 상표를 등장시키는 PPL 광고는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돈을 들여야 성사된다. 특히 ‘본드의 옷’, ‘본드의 차’, ‘본드의 시계’ 등등의 고유명사로 불릴 수 있으려면 천문학적인 돈과 맞바꿔야 한다.


하지만 볼렝저는 73년작 ‘죽느냐 사느냐’에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광고비를 낸 적이 없다. 브로콜리와 볼렝저, 두 가문의 수장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뢰와 우정으로 관계를 지속시킬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상표가 확실히 노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잔 속에 담긴 황금빛 물로만 등장한다(이번 개봉작 ‘스펙터’에선 심지어 샴페인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 조각이 난다).


영국 왕실서 최고 대접받는 볼렝저 샴페인 “볼렝저! 69년산이라면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


79년작 ‘문레이커’에 출연한 3대 제임스 본드 배우 로저 무어의 대사다. 제임스 본드는 왜 볼렝저를 선택했을까. 그건 아마도 영국 왕실이 사랑한 고급 샴페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볼렝저는 폴 로저, 루이 뢰드레와 함께 가족 소유로 운영되는 3대 샴페인 하우스 중 하나다. 샴페인이 생산되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 중에서도 중심지인 아이 지역에 위치한 볼렝저 와이너리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현존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볼렝저와 영국 왕실의 인연은 1884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왕은 볼렝저 샴페인에 왕실인증을 하사한다. 이 왕실인증은 매년 갱신되기 때문에 품질에 따라 승인 여부가 달라지지만, 볼렝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인증마크를 놓쳐본 적이 없다.


현재 영국 왕실 인증을 받은 샴페인은 등급에 따라 6종류가 있다. 주요한 손님을 모실 때면 모든 종류를 각기 다르게 대접하는데, 볼렝저는 그 중 가장 윗 등급이다. 덕분에 찰스 왕세자와 고 다이애나비의 결혼식 때는 볼렝저 알디(RD) 1973년산이 사용됐다. 월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연회에선 볼렝저 스페셜 꾸베 브뤼가 사용됐고, 두 사람의 아들인 조지 알렉산더 루이스 왕자가 태어났을 때도 영국 왕실은 축하주로 볼렝저 그랑 아네(Grande Annee)를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 왕실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볼렝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왕은 에드워드 7세다. 그는 볼렝저 샴페인을 아주 좋아해서 ‘볼렝저 샴페인’이라는 이름 대신 늘 ‘스페셜 꾸베(Special Cuvee)’라고 불렀다. 꾸베는 샴페인 압착 시 최초에 뽑은 즙을 뜻하며, 최고급 샴페인은 오로지 이 꾸베만을 사용한다. 그래서 업계에선 최고급 샴페인을 ‘꾸베’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8년 ‘퀀텀 오브 솔러스’ 개봉 당시 출시한 총알 모양 케이스의 ‘그랑 아네 매그넘’

턱시도에서 영감 얻은 제임스 본드의 샴페인 수많은 첩보물에 영감을 준 007시리즈도 2006년부터 새로운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를 통해 변신을 꾀한다. 말끔한 수트 차림에 잘생긴 얼굴, 유들유들한 말솜씨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카사노바형 제임스 본드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고독한 제임스 본드로 변신을 시작한 것.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첫 선을 보인 다니엘 크레이그는 수트보다는 점퍼 차림이 더 잘 어울린다. 기름기를 쪽 뺀 건조한 얼굴에선 좀체 미소를 찾아보기도 힘들다(사실 그는 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대 007 시리즈에 등장했던 샴페인 장면과 최근작 ‘스펙터’의 한 장면

볼렝저 가문이 007시리즈를 위한 스페셜 이벤트를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영화 속에 언제나 볼렝저 샴페인이 등장하고, 시사회 등의 특별한 행사 때는 만찬주로 볼렝저 샴페인을 마셨지만, 눈에 띄는 이벤트는 한 적 없던 볼렝저 가문이 2008년 ‘퀸텀 오브 솔러스’부터 007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007 캐릭터가 연상되는 케이스를 만들고 레이블에도 007이라는 이름을 붙인 한정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퀀텀 오브 솔러스’ 개봉 당시 출시한 그랑 아네 매그넘 병은 총알 모양의 케이스에 담겼다. 2012년 ‘스카이폴’ 개봉 때는 ‘002 for 007’이라는 이름으로 그랑 아네 2002 빈티지 제품이 출시됐다. 이 제품은 4자리 비밀 번호를 입력해야만 열 수 있는 소음기 권총 모양의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최근에는 ‘스펙터’ 개봉에 맞춰 ‘볼렝저 스펙터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했다. 제임스 본드의 블랙&화이트 턱시도 차림에서 영감을 얻은 케이스가 돋보이는 이 제품은 기존 007 시리즈에 사용되던 그랑 아네, 알디와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2009 빈티지 제품이라 더욱 화제다. 그랑 아네와 알디가 그랑 퀴르 포도 및 1등급 포도를 섞어서 만드는 반면, 2009 빈티지 샴페인은 100% 그랑 크뤼 포도만을 사용해 만든 최고급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턱시도 케이스는 샴페인을 마시기에 적당한 차가운 운도를 2시간 동안 유지시켜 준다. 국내에선 신동와인을 통해 딱 570병만 한정 판매된다. 가격은 34만4000원.


볼렝저 가문을 일으킨 상징적인 인물 마담 릴리 볼랭저(Lily Bollinger)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행복하거나 또는 슬플 때 샴페인을 마신다. 그리고 아주 가끔 외로울 때도 샴페인을 마신다. 하지만 절대 그 외의 시시한 이유로는 샴페인 병을 건드리지 않는다.” 3년 만에 찾아온 24번째 007시리즈와 볼렝저 샴페인이 시시한 일상을 날려줄 만한 선물일까.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볼렝저,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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