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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함포술 정통한 이순신, 대항해시대가 요구한 리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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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12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공과 명의 참전으로 양국은 한강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하는 강화협상(1593년)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순신이 23전23승의 승전보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분단의 비극은 그때부터 실현됐을지 모른다. [중앙포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누가 모르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영화 ‘명량’의 대사처럼, 최악의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헌신성과 애민(愛民) 정신 등은 지도자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순신 리더십’이 끊임없이 조명되는 이유다.


『대항해시대의 국가지도자 이순신』(서울대 출판문화원) 역시 언뜻 보면 숱한 이순신 관련 저서 중 하나로 보인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소장 김병섭)가 주도해 국내외 이순신 전문가 10명이 공동 집필했지만 책은 인간 이순신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외려 16세기 말이라는 시대 상황, 당시의 세계 경제 질서, 조선·명·일본 등 동아시아의 대응 방식 등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개인 이순신’이 아닌 ‘구조 속 이순신’을 파고든다. “조선은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설 기회가 있었다. 그걸 근시안적 사고로 놓쳤다. 그나마 이순신이 있었기에 파국은 면할 수 있었다. 없었다면 한반도는 400년 전 분단됐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고 있다.


“대항해시대를 여는 주요한 두 가지 요소, 즉 은(銀)과 함포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선은 이를 걷어찼다.”

책을 엮어낸 김병섭(서울대 행정대학원·사진) 교수의 말이다. 행정학자로 이순신 리더십을 연구하는 통에 조선 초·중기 역사에 천착하게 된 그는 “건국 초기만 해도 조선은 아시아의 넘버 2 국가였다”고 전했다.


명나라에 조공(朝貢)무역을 하던 조선이 넘버 2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조공무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명이 신뢰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공물을 바치면 명은 그 이상의 공물을 내리곤 했다는 얘기다. 15세기 조선은 1년에 최다 네 차례 무역을 했다. 반면 일본은 10년에 고작 1회 명과 거래할 수 있었다. 일본은 더 늘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명은 무시했다. 그만큼 일본은 주변국이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연산군 때 개발된 ‘회취법’이라는 제련기술 덕이었다. 명나라가 건국 직후부터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채택하는 등 대항해시대 은은 사실상 국제화폐나 다름없는 교환 기준이었다. 환차익까지 거둘 수 있어 유럽 상인들은 너도나도 은을 들고 중국행에 나섰다. 폭발적인 은 수요였음에도 조선은 은 생산을 막았다. “건국 초 조선은 은을 생산할 수 없어 세종 때 간신히 조공품목에서 제외시켰다. 그것을 번복하는 건 명과의 신뢰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본 것”이라는 설명이다. 무역을 ‘장사치’로 업신여기는 성리학적 풍토도 저변에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틈새를 파고든 건 일본이었다. 조선의 ‘회취법’을 수입해 1530년부터 자체 생산에 들어갔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회취법 도입 이후 이와미 은산을 포함한 은광 개발이 붐을 이뤘다. 16세기 중반 일본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으로 발돋움했다”고 전했다.


함포 제작 기술에서도 조선은 앞서 있었다. 고려 말부터 난립했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함포 사격술은 평범한 군사 기술이 아니었다. 1509년 디우(Diu) 전투에서 배의 측면에서 포를 쏘아댈 수 있었던 포르투갈은 오토만제국 등을 무참히 무너뜨렸고 이후 세계 해양을 호령했다. 함포 기술이 세계 최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최첨단 군사력으로 무장할 수 있음에도 조선은 이를 방치했고, 일본 조총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김 교수는 “정변 때 화기가 사용될 수 있다는 불안감 등이 기술 발전을 가로막은 것으로 추산된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조선 집권층이 시대 흐름을 철저히 배반한 데 반해 이순신만이 외롭게 버텨냈다. ‘수군 중시’ 자체가 비주류의 사고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오직 육전(陸戰)에만 관심을 두었다. “대저 섬나라 오랑캐는 수전에는 장점이 있어도, 기전(騎戰)엔 단점이 있으니 패주하는 체하여 땅으로 내려오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심지어 수군통제사였던 원균마저도 “육지로 유인해 공격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성을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을 다했기에 나라가 적의 소굴로 번진 거 아니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순신의 강력한 제해권은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했고, 조선·명 연합군과 일본 간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동아시아 질서의 버팀목이었다. 김 교수는 “조선 관료가 명에만 의존하는, 소중화(小中華) 사고에 집착했지만 이순신은 바다 바깥의 세상을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총통으로 대표되는 화포를 판옥선에 장착한 것도 이순신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숫자는 절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거대한 판옥선에 수군을 몰아넣기보다는, 배의 크기를 줄여 기동성을 높이는 게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의 함포 기술을 최대한 동원했다. 대형 총통을 탑재한 함선으로 왜선의 ‘백병전’에 맞불을 놓았다. 제장명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당시 사정거리 1000보에 이르는 별황자총통 등은 적을 압도하는 결정적 무기였다”고 전했다.


결국 이순신 리더십의 또 다른 측면은 시대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첨단 기술을 수용하는 열린 사고였다. 김 교수는 “미국·중국·일본 등에 둘러싸여 선택을 강요받는 현 상황이 임진왜란 직전과 다르지 않다”며 “영리한 외교 전략으론 한계가 있다. 스스로 힘을 기르는 자강(自强)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이순신이 웅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배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항로를 개척하고 무역을 하던 시기를 말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마젤란의 세계 일주,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등이 대표적 예다. 이때를 기점으로 대륙 국가에서 스페인·포르투갈 등 해양 국가로 세계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도발한 배경엔 대항해시대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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