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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 기자단 따라잡기] 조선시대의 서울대, 성균관 유생 되어볼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난 1일, 역사통 기자단 2기는 마지막 답사를 위해 성균관으로 향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를 가르친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입니다. 조선 500년의 정신적 버팀목이 된 유교 이론을 학습하고 발전시킨 장소죠. 조선의 건국이념을 따라온 역사통 기자단 2기는 성균관 유생이 되어 조선시대 정신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유교 사상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알아봤습니다.

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카툰캠퍼스가 함께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2기 - 성균관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2기(화성 석우중),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 성균관 문화재청 중앙포토,
해설=오덕만 문화살림 활동가,
진행=권소진 인턴기자, 김진형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 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 · 김지
호(한국외대 2)·송윤아(한국외대 1) · 오나영(이화여대 1) 대학생 멘토

유생 의복을 갖춘 역사통 기자단 2기가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성현들에게 배향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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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 까닭은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를 배출해낸 국립대학입니다. ‘유생’이라 불린 성균관 학생은 강도 높은 수업을 통해 유교 사상을 배우며 엄격하게 생활했어요. 조선의 건국이념을 후학에게 가르쳐 조선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죠.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고려시대 국가의 중심 사상은 불교였어요. 정치 질서를 잡는 단순한 역할에 그쳤던 유교가 어떻게 불교를 제치고 건국이념으로 등극했을까요. 조선은 왜 국가 교육기관까지 세워가며 유교사상을 발전·계승했을까요.

답은 고려 말, 혼란의 시기에 있습니다. 당시 무능한 왕실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력들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웠고, 왕과 국가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죠. 이때 고려 학자 정도전과 신흥세력 이성계는 유학의 한 종류인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국가 설립을 계획합니다. 고려 정권을 주도하던 세력을 배척하고, 새로운 국가 질서를 확립하는데 성리학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던거죠.

사실 성리학은 고려 학자인 ‘안향’에 의해 13세기 말 처음 전파됐습니다. 이후 고려 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성리학을 발전시켰죠. 하지만 불교를 중시하던 고려에서 성리학은 일부 계층에서만 알고, 백성층에는 퍼지지 않았습니다. 인(仁)과 예(禮)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를 기준으로 옳고·그름, 선·악을 판단합니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이를 바탕으로 왕과 신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남편과 아내, 친구와 친구 사이에 지켜
야 할 도리를 익혀 함께 돕고, 이해하며 살 수 있는 국가의 기본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새 나라 조선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종묘와 사직을 세워 조상과 땅·곡식의 신에게 제를 지내며 국가의 기틀을 잡았어요. 또 수도에는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유교 사상을 익힌 인재를 양성하며 건국이념을 유지, 무려 500년간 나라를 이어갔죠.

대성전 성현에게 예를 다하는 곳

성균관은 크게 대성전과 명륜당의 두 영역으로 나뉩니다. 대성전에서는 학덕이 높은 성현(聖賢, 어질고 올바른 사람)들의 위패(죽은 사람의 혼을 무달래는 나무패)를 모셔 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륜당에서는 누구라도 배움을 통해 성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에 정진했고요.

역사통 기자단은 대성전 앞에서 허리를 굽혀 절하는 배향으로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배움을 익혀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의 표현인데 처음 성균관에 온 사람은 모두 대성전 앞에서 인사를 드려야 하죠. ‘문묘’라 불리는 대성전은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비롯해 성현 39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공자, 공자의 제자인 증자·맹자·안자·자사(4대 성현), 그들의 제자 10명(공문10철), 송나라 6명의 성현(송조6현), 우리나라 18명의 유학자(동국18현)들로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있죠.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위패가 놓여져 있는데 공자의 위패와 가까울 수록 그 위상이 높습니다. 대성전에서는 매년 2·8월에 성현들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한 제사, ‘석전(釋奠)’
을 지냅니다. 성균관 문묘의 석전은 유교 제사의식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규모가 가장 커 ‘석전대제’라 부르죠. 성균관의 최고 어른인 ‘대사성’을 중심으로 치러지며 종묘제례와 마찬가지로 향과 술을 올려 혼을 부르고, 기악과 성악, 춤을 추는 문묘제례악을 통해 혼을 달랩니다. 석전 대제를 진행하는 제관들은 제를 지내기 3일 전부터 문상·문병을 비롯해 음악까지 금하며 오로지 제에 관한 일에만 전념하는 산재·치재에 들어갑니다. 유생들은 석전대제에 참여해 문묘에 배향된 성현들에게 예를 다하며 그들을 본받아 몸과 마음을 다스려 어질고 너그러운 행동에 힘쓰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명륜당 덕을 쌓아가는 배움의 공간

대성전 담장을 넘어 뒤쪽에는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륜당은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유생들이 수업을 듣는 강의실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에서 치르는 시험인 초시(初試)에 합격해 ‘진사’나 ‘생원’이 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한 후에는 3년에 한 번 열리는 과거 시험 중시(中試)와 각 지방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과거 시험을 준비했죠. 즉,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친 후 졸업시험(초시)을 통과하면 대학(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고, 국가의 높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국가고시(과거)를 치르는 과정이라 이해할 수 있어요.

유생들은 세 번의 북소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과 옷을 단정히 정리한 후 글을 읽고,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세수를 하고 돌아와 다시 책을 읽고,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식당에 마주 앉아 아침식사를 했죠. 이처럼 유생들은 아
침에 일어나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후 글을 읽고 식사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기본으로 배웠습니다. 단계별로 총 7가지 과목으로 구성돼 초급부터 고급까지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공부할 수 있었죠. 유교를 처음 만든 공자의 말과 행동, 그 의미, 중국의 시 등을 읽으며 성현들의 유교 사상을 배웠습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2~3년 동안 읽기를 반복하며 그 뜻을 되새겼죠.

명륜당은 청렴하고 소박한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에 따라 간단한 구조로 돼있습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인 존경각과 활·화살을 보관하는 육일각이 자리했죠. 성균관은 1년에 최소 150명에서 최대
200명 정도의 유생만을 수용하며 여러 분야에서 고르게 뛰어난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명륜당 동쪽에 자리잡은 학생 식당인 진사식당에서는 원점제를 통해 학생의 건강을 책임지고, 성실함을 평가했습니다. 식사에 참석하면 1점을 받고, 300점이 되어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죠. 학생들은 매일 아침저녁 식사를 하며 건강을 챙길 뿐 아니라 일정한 시각에 규칙적으로 생활해야만 했어요. 더불어 유생의 개인 시간표를 학교에 맞춤으로써 하루 일과가 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질 수 있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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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현 역사통 기자단 2기 | 대성전의 좌우에는 동무와 서무가 있어요. 원래 공자의 제자 72명을 포함해 중국과 조선의 18성현 등 11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지만 광복 후 조선의 18성현은 대성전으로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땅속에 묻었죠. 이외에도 대성전 서쪽으로는 제사를 위해 필요한 여러 건물들이 모여 있어요. 대성전 서쪽 문으로 나가면 제사에 쓰이는 제기들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성균관 하인들이 머무는 ‘수복청’이 있어요. 수복청 위쪽으로는 제사에 올려질 고기를 살생하는 ‘전사청’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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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은 역사통 기자단 2기 | 명륜당 앞 마당에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어요. 은행나무는 유교의 상징목이에요.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에서는 주로 문묘나 향교, 서원 등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죠. 은행나무는 향교나 사당에 실질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고 해요. 가을에 은행열매를 수확해 번 돈으로 제사를 지내고, 성균관 관리 비용으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역사통(通) 기자단의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은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하고 그 내용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코너입니다. 다양한 방식의 퀴즈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번 주는 성균관 건물의 설명을 읽고, 배치도에 건물의 이름을 넣어보는 퀴즈입니다.

아래 그림은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입니다. 성균관은 크게 제(祭)를 지내는 공간과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건물의 역할에 따라 배치되어 있죠. 성균관 건물 소개가 적힌 보기를 읽고 배치도에 각 건물의 이름을 넣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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