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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FTA는 한국의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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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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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
이화여대 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무역입국 전략으로 기적의 역사를 쓰면서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Trans Pacific Partnership)이 10월 초 타결됐다. 세계 경제의 40%, 세계 무역의 25%가 넘는 비중을 가진 TPP가 타결되자 언론들은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몰아세우고 있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은 오마바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TPP 가입 의사를 밝혔다. 세계 8대 수출입 국가인 한국은 왜 TPP 참여를 망설였을까. 새삼스럽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한국의 TPP 참여에 발목을 잡은 요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TPP가 한국에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게 된 것은 2013년 2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전격적으로 TPP 참여를 선언하고 나선 직후부터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정부가 막 출범할 때다. 좌고우면하던 정부는 2013년 하반기 TPP 참여를 타진했지만 협상 주도국인 미국으로부터 협상 막바지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 표명을 듣고 물러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만 해도 미국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신속협상권한(TPA)도 부여받지 못한 상황이라 한국의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협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 의회로부터 TPA를 받아낸 것은 그로부터 1년 반도 훌쩍 넘은 올해 6월이었다. 이때부터 협상은 진정한 막바지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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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말만 액면 그대로 믿고 한국 정부가 TPP 참여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권 초반에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 통상협상에 참여해 반미 세력에 빌미를 줄까 우려도 했으리라. 미국 주도의 TPP 협상에 참여함으로써 중국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으리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TPP의 우선순위가 밀렸다면, 타결된 한·중 FTA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FTA는 하는데 통상정책은 안 보인다’는 비난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내수는 여전히 침체돼 있고 수출마저 지속적으로 감소되는 상황에서 한국 수출의 25%를 책임지는 중국 시장을 선점할 수 있고, 한국의 관심 분야인 서비스 개방 후속협상을 가능케 하는 한·중 FTA를 발효시키려는 정치력은 실종됐다.

 그간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TPP 12개국 중 10개국(일본·멕시코 제외)과 FTA를 체결했기 때문에 TPP 참여의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TPP의 누적원산지 규정은 한국이 놓친 것이 12-10=2보다 훨씬 더 크다. 한국과 일본은 원자재와 부품을 동남아로 수출하고 동남아 국가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생산분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본 기업이 TPP에 가입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누적원산지를 사용해 수출시장을 확대하는데 한국 기업은 양자 FTA에 의존한다면 어느 쪽이 불리한지는 자명하다. 일본의 TPP 참여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이 힘들게 구축해 놓은 FTA 경제외교망을 한순간에 뒤흔드는 ‘신의 한 수’다.

 국내 정치, 중국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과의 FTA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한국은 2004년 11월 일본과의 FTA 협상을 중단한 이후 재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일 FTA에 대한 국내의 반대 때문이다. 일본과 지속적 무역수지 적자인 상황에서 일본보다 관세율이 높은 한국이 일본과 FTA를 하게 되면 불리하다는 주장이 활개를 친다. 그 논법대로라면 한국은 훨씬 관세율이 낮은 미국·유럽연합(EU)과는 왜 FTA를 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본과의 경쟁을 두려워했다면 지금의 한류 열풍은 가능했을까. 줄이면 한국 영화가 망한다던 스크린쿼터의 경우 2006년 절반으로 줄였음에도 한국 영화는 더 강해지고 더 다양해졌다.

 일본 자동차가 몰려오기 때문에 한·일 FTA를 반대한다는 것은 국내 자동차업계의 반대 논리가 될지는 몰라도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 소비자들의 ‘국산차 사는 우리만 봉’이라는 팽배한 불만을 아는 정부 당국자가 숨을 그늘은 아니다. 통상교섭권한을 새로 틀어쥔 산업통상자원부가 자동차산업을 관장하기 때문에 미온적이라는 의혹에 떳떳할 수 있을까.

 한·일 FTA를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국내 시장을 더 경쟁적으로 만들어 국내 가격에 낀 거품을 걷어내면 소비자의 실질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농업시장 개방에 대한 미적지근함이 TPP를 통해 해소되었음은 한·일 FTA를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추동력을 준다. TPP에 참여하면서 한·일 FTA를 추진하는 것은 최악의 관계로 방치돼 온 한·일 관계를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한국이 둘 수 있는 ‘신의 한 수’다. 한·일 FTA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 주권을 신장하고 평균 한국인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비전을 TPP 가입에 담아야만 기득권의 반대를 극복하고 한국은 선진국 깊숙이 뿌리내리는 전진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런 것이 창조경제 아닌가.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