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여행은 아날로그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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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배시시 웃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인연이지만, 이 퇴역한 기자가 왜 이 대목에서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물곰국(곰칫국)을 마시는 아침나절의 풍경 중 하나에는, 물곰국을 앞에 두고 앉은 그와 제가 있었습니다. 새벽까지 소주를 마신 날 아침나절, 그가 앞장서 들어갔던 울진 죽변항의 허름한 식당에서 우리는 “이런 국물은 이 지구상에 울진 말고는 없다(57쪽)”며 맞장구를 쳤지요. 그리고 다시 소주잔을 들었습니다.

김훈은 이 시대 아날로그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여태 폴더 폰을 쓸 뿐더러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도 모릅니다.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고, 글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씁니다. 그렇게 온종일 글을 쓴 날 저녁 그의 책상에는 글이 가득한 원고지 서너 장과 ‘지우개 똥’만 소복이 쌓입니다. 김훈에게 자전거는, 아날로그형 인간 김훈을 완성하는 일종의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김훈을 읽을 때마다 여행이야말로 아날로그라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공간에 아무리 여행 정보가 넘쳐나고, 온갖 첨단 방법을 동원해 예약을 해도 결국 내가 내 몸을 움직여야 여행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을 굳이 찾아가 내내 동경했던 바로 그 장면 앞에 서는 일을, 평생 구경도 못 해 본 이국의 음식을 제 입에 넣는 일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몇 해 전 김훈과 새재를 넘었을 때 장면입니다. 새재를 넘자 김훈은 신발을 벗고 무좀 걸린 발가락을 긁었습니다. “흉하냐? 내 여행의 흔적이다.”여행은 아날로그입니다. 하여 사람입니다.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편집장 손민호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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