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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과 정화… 베토벤 음악의 또다른 절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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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27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op.111 악보

유라 귈러 음반

유라 귈러(Youra Guller, 1895~1980), 프랑스 태생 피아니스트, 그가 아니었다면, 그의 연주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진면목을 깨닫지 못했을 것 같다. 이 불행하고 오만한 작곡가에 대한 친애감과 경외심도 이 마지막 소나타를 듣고 한결 돈독해졌다. 그 영향으로 오래 묵혀두고 꺼내보지도 않던 얄팍한 책자 『베토벤 이야기』(이덕희 편역)까지 꺼내 읽게 되었으니 그의 연주는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셈이다.


오디오 생활 초기라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은 기본 교과서처럼 우선 마련하는 목록이다. 켐프나 박하우스 음반들을 두루 준비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월광’ ‘비창’ 등을 들었다. 많은 시간을 그의 피아노 소나타에 집중했기 때문에 후기 소나타 3곡도 물론 빠트리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32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역시 이 소나타는 일부 견해처럼 삶의 경륜과 성찰이 풍부해진 다음에야 연주도 좋아지고 감상자 귀에도 와 닿는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구태여 변명하자면 완벽하게 사로잡지 않으면 대충 흘려듣는 버릇이 작용한 탓은 있을 것이다. 마담 귈러는 나를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30번 이하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에는 따로 별칭이 없는데 이것은 앞 선 작품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후기작들은 앞의 작품들과 형식, 내용이 많이 다른데 32번은 그런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거의 표현주의에 가까운 거친 불협화음이 등장하는 1악장의 격렬성, 그것과는 전혀 다른, 평온하고 완만한 바다의 물결 같은 2악장은 서로 같은 곡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하나 이 곡은 특히 그런 것 같다. 특히 장려한 변주풍의 2악장 아리에타(아리아와 유사)를 두고 어떤 이는 천상의 울림이나 구원에의 희구를 말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것보다 실제 삶의 과정을 깊이 반추하고 서사적 회상과 감회에 젖게 되는, 그런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마담 귈러에 대한 나의 존경스런 기억, 현대에 이 곡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을 담은 귈러의 연주를 다시 듣고 싶어 하는 내 희망을 그에게 전해주겠소?” (로맹 롤랑)


귈러의 베토벤 연주에 격찬을 보낸, 자신이 음악학자이기도 했던 로맹 롤랑의 이 짧은 언급을 보고 문득 그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의 곡절 많은 서사가 떠오른다. 그것은 베토벤의 이야기이고 어떤 점에선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타협 없는 이상의 극점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베토벤과 거의 동일한 궤적의 삶을 살았다. 이런 유형은 세속행복과 거리가 멀다. 『베토벤 이야기』 부록에 서술되는 베토벤의 여인들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가 세속행복과는 담을 쌓고 살 수 밖에 없는 필연이 느껴진다. 그의 음악도 사실 세속과 그다지 가까운 것은 아니다.


로맹 롤랑이 평가한 귈러의 독특한 해석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견일 수 있으나 그것은 신비적 분위기로 일관하는 다른 많은 연주들과 구별되는 서사적 연주라고 생각된다. 아리에타에서 이름 있는 많은 연주자들이 매우 신비스런 분위기를 애써 만들어 연주하는 것을 본다. 리히터가 그렇고 박하우스가 그렇고 젊은 축에 드는 바렌보임도 마치 미사곡 연주하듯 지나치게 엄숙하고 느리게 연주한다.


귈러의 연주는 모든 톤이 명확하며 신비감을 자아내려는 애매하고 흐릿한 구석과 멈칫거리는 주저도 없다. 능청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고요한 평정심에서 바라보는 삶의 여러 정경들이 긴 띠처럼 장려한 서사적 풍경으로 심금을 울리며 다가온다. 귈러와 가장 근접한 연주가 같은 프랑스 태생이며 선배격인 이브 낫의 연주이다. 그의 연주도 선이 명확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생생함이 느껴진다. 이런 성격의 연주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 소나타 악보를 보면 32분 음표가 사슬로 연결된 거대 성벽처럼 시커멓게 오선지를 뒤덮고 있는 매우 기괴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악보를 본 적이 없다. 이 기괴한 악보에서 그처럼 깊은 위안과 감정의 정화를 안겨주는 음악이 태어난다는 것이 신비롭다. 32번 피아노 소나타, 특히 2악장은 바흐의 샤콘과 비견되는 명편이며 베토벤 음악의 또 다른 한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곡가는 28번 소나타를 작곡한 뒤 친구 크롬폴즈에게 지금까지 써온 소나타곡들에 불만을 털어놓고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크롬폴즈는 한때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하다. 추측컨대 작곡가는 주제에 매달려 꽉 짜인 형식의 틀 안에 갇힌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 같고 그는 새로운 계획을 너무도 훌륭하게 완수해낸 것이다.


후기 3곡의 소나타에서 악성은 주제와 명작이라는 유혹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롭게 비상한다. 그 비상이 전작들과 전혀 다른 감동으로 전해 온 걸 느낀다. 특히 32번 아리에타가 들리는 18분 동안의 감동은 바흐의 바이올린 곡 파르티타 2번의 ‘샤콘’에서 느꼈던 ‘그것을 듣고 나서 삶의 곡절 많은 긴 회랑을 의미심장하게 반추하며 거쳐 온 것 같은 느낌’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이 곡이 어떤 의미에서 베토벤의 진정한 고별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송영 작가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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