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아웃사이더들의 반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사 이미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벤 카슨, 칼리 피오리나. 15명이 난립한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3명의 공통점은 아웃사이더다. 평생 공직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정치 문외한들이다. ‘초짜’들의 기세가 무섭다. 마라톤 대회에 처음 출전한 아마추어들이 프로들을 제치고 초반 레이스를 주도하고 있는 모양새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는 87억 달러(약 10조원)의 자산을 소유한 부동산 재벌. 스물네 살 연하의 ‘트로피 와이프’와 함께 전용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요란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수준으로 평가되는 언어 구사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트럼프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카슨은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 환자를 살리듯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거듭된 막말 논란으로 트럼프가 주춤하는 사이 전문경영인 출신인 피오리나도 치고 올라가고 있다. 미국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인 휼렛패커드(HP)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여장부다운 파이팅이다. 아웃사이더들의 기세에 눌려 공화당 주류 정치인 출신 후보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기사 이미지

 퍼스트레이디 출신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독주가 예상됐던 민주당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클린턴이 ‘e메일 게이트’에 발목이 잡혀 고전하고 있는 사이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70대 노정객인 샌더스도 민주당 주류의 시각에서는 아웃사이더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3분기 중 260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금해 2800만 달러를 거둔 클린턴과 거의 대등한 경쟁을 벌였다. 더구나 그에게 후원금을 낸 사람들 대부분은 풀뿌리 소액기부자들이다. 큰손에 의존하는 클린턴 진영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웃사이더들의 반란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 지난달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은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다. 30년 넘게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지만 그와 말을 섞어 본 노동당 의원들은 극소수다. 철도산업 국유화, 국·공립대 무상교육, 부자증세, 핵무기 철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등 그가 내건 공약들은 노동당의 기존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일반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로 노동당의 새 리더가 됐다. 올 들어 두 번이나 실시된 그리스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한 41세의 좌파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모델이다. 주류 정치인들이 보기엔 이단아에 가깝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불고 있는 ‘아웃사이더 돌풍’에 대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의 존 던(정치학) 교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누적된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달 방한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직업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아웃사이더들이 부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웃사이더들이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으로 보면 한국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최고지도자인 대통령부터 여야 정당 대표들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치 양보 없는 치졸한 권력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나라와 국민은 뒷전이고, 자기와 자기 세력의 몫을 챙기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개인과 계파, 당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지대추구형 정치의 전형이다. 그런 정치권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한국에서도 아웃사이더들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정당이 바람을 일으켜 정치를 쇄신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비전과 능력, 신념과 도덕성을 갖춘 인물과 그런 사람들이 모인 정당이라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도 없다.

 물론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 대중적 인기가 반드시 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웃사이더가 판치는 미국의 대선 레이스도 결국은 주류 정치인들의 대결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세상사가 꼭 ‘통념(conventional wisdom)’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 편이라는 믿음만 줄 수 있다면 연애 상대가 결혼 상대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트럼프 같은 ‘속 빈 강정’만 아니라면 아웃사이더도 아웃사이더 나름이다.

 뜻있는 아웃사이더들이 총궐기해 갈 곳을 잃은 표심을 붙잡아야 한다. 전략공천이란 꼼수로 포장된 사이비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진정성과 현실감각을 갖춘 제대로 된 아웃사이더들이 대거 나서야 한다. 유권자들도 ‘될 사람’이 아니라 ‘돼야 할 사람’을 찍어야 한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올바른 선택이 정치를 바꾸고 나라를 바꾼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