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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고국 … 33년 만에 한국 온 영화 ‘하녀’ 주인공 이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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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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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심(왼쪽)씨가 하녀로 출연한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 ‘하녀’의 한 장면. 가운데 남자배우는 고 김진규.

지난 1일 개막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멀리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영화 ‘하녀’(1960, 김기영 감독)의 여주인공 이은심(80)씨가 지구 반대편의 브라질에서 33년 만에 귀국, 관객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또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프랑스에 입양됐던 쌍둥이 자매를 26년 만에 만난 한국 입양아 출신 미국 배우 서맨사 푸터먼(28)도 자신의 경험을 담은 다큐멘터리 ‘트윈스터즈’를 들고 고향인 부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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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하녀’의 주인공 이은심씨. [사진 라희찬(STUDIO706)]

한국 영화 사상 독보적인 캐릭터로 추앙받는 영화 ‘하녀’의 하녀. 그 주인공인 이은심씨가 33년 만에 고국의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4일 청바지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소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이씨는 “함께 온 손녀딸이 ‘관객이 할머니를 몰라 극장에 오지 않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더라”며 “이렇게 따뜻하게 반겨주셔서 감사하고, 오길 잘한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부산영화제 두 여인의 특별한 귀향

 1959년 영화 ‘조춘’으로 데뷔한 이씨에게 두 번째 작품인 ‘하녀’는 그야말로 출세작이다. 중산층 4인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하녀는 기괴하면서도 욕망에 충실한 악녀였다. 개봉 당시 한 관객이 영화를 보다가 “저년 죽여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 한편으론 주류 계급 사회의 배타성과 비열함에 희생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하녀가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개성 강한 얼굴과 분위기의 존재 자체만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 유례없는 캐릭터였다”며 “이은심은 그 역할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배우였다”고 평했다. ‘하녀’는 심리 스릴러의 걸작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세계 각국 평론가와 감독이 뽑은 ‘아시아 영화 100선’의 10위에 선정됐다.

 이씨가 김기영(1919~98) 감독을 처음 만난 곳은 영화인들이 많이 가는 한 다방에서였다. “저는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았지만 김 감독이 저를 보고 (특별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촬영을 할 때 직접 연기를 해보이면서 ‘배우는 인형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연기해달라’고 했고, 저는 그걸 따라하기만 하면 됐어요.” 상대배우였던 고 김진규(1923~98)씨에 대해서도 “연기를 못해도 늘 살갑게 타이르고 알려줬다”며 “고국에서 한 번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아쉬워했다. 이씨는 하녀가 죽는 마지막 장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다. 쥐약을 먹고 계단에 거꾸로 누워서 죽어가는 상황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던 담배 피우는 장면도 “피울 줄 몰라 실수를 많이 했고, 여러 번 연습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하녀’ 이후 영화 몇 편을 더 찍었지만 이씨는 자신이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남편인 이성구 영화감독의 몸이 쇠약해지면서 82년 부부는 이 감독의 누나가 있는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영화와도 미련없이 이별했다. 그 사이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변주해 ‘화녀’(1971) ‘화녀82’(1982) 등을 발표했고, 2010년엔 임상수 감독, 전도연 주연의 리메이크 작 ‘하녀’가 나오기도 했다. 브라질에서 리메이크 작을 봤다는 이씨는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연기도 잘하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딸, 손녀딸과 부산을 찾은 이씨는 고인이 된 남편의 영화 ‘장군의 수염’(1968)을 3일 관람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객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나는 조국이 늘 자랑스러웠고, 한국이 뉴스에 나오면 길게 나왔으면 했어요. 브라질에서 죽겠지만 언제나 한국사람이란 걸 느낍니다.”

부산=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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