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왜 파업이 자주 일어나나] 좌파 전통 강해 파업에 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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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최근 들어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서유럽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진다는 뉴스가 자주 들린다. 사태가 가장 심각하다는 프랑스에서는 19일 또 한차례 대규모 파업시위가 벌어질 예정이다. 파업이 서유럽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유독 그 지역에서 파업을 벌이는 장면이 외신을 통해 자주 전달된다. 서유럽에서 파업이 자주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파업에 너그러운 토양=유럽의 뿌리깊은 좌파적 토양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긴 하지만 1990년대 말에는 유럽연합(EU) 15개 회원국 가운데 11개국에서 좌파가 집권했었다. 그만큼 좌파 지지층인 노동조합의 힘도 컸다. 과거 영국의 광산노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의 공공노조와 독일의 금속노조는 지금도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강력한 단결력을 보여준다.

파업에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은 여론도 한몫 한다. 유럽인들은 "나도 언제든지 파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파업에 관대한 편이라고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이는 파업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이로 인한 불편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유럽인의 생각이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파업문화가 정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유럽 노동자들은 파업을 자주 하면서도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올들어 내내 파업과 시위를 벌여온 프랑스 공공노조도 경찰과 물리적으로 충돌한 것은 이 달 10일이 처음이었다. 정부가 합법적인 파업에 공권력을 동원하는 일도 없다.

◆미국보다 짧은 노동시간, 많은 파업일수=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미국인과 유럽인의 노동시간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미국 노동자 한 사람이 연 평균 1천9백76시간을 일한 반면, 독일인은 이보다 22%가 적은 1천5백35시간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인은 독일인보다 더 적게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79년부터 99년 사이 노동시간은 미국에서 50시간(3%)이 늘어났지만 독일에서는 오히려 12%가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적게 일하는 유럽인들이 파업은 미국보다 많이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92년부터 2001년 사이의 10년 동안 파업이 가장 잦았던 스페인에서는 노동자 1천명당 2백71일의 파업일수를 기록했다. 덴마크와 이탈리아.핀란드.아일랜드.프랑스는 파업일수가 80일에서 1백20일 사이였다. 같은 기간 중 미국의 파업일수는 50일에도 못미쳤다.

◆최근 파업의 원인=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때 완벽을 추구했던 사회보장 제도가 무너지는 데 따른 후유증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최근 유럽에서 일제히 불거지고 있는 연금개혁 논의는 노령화로 재정수요가 늘어나면서 과거의 복지제도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각국 정부가 퇴직 연금액을 줄이고 연금수령에 필요한 근무연수를 늘리려고 한 데서 비롯한다. 퇴직연령을 늦추고 다른 복지혜택을 삭감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달 초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규모의 파업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지난 11일 노조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복지혜택을 상당부분 삭감하는 연금개혁안을 의회가 승인했다. 이에 따라 한 때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던 오스트리아의 복지제도가 크게 바뀌게 됐다.

프랑스는 현재 정부측에서 노인층 인구 증가로 인한 연금제도의 파산을 막기 위해 공공부문은 37.5년, 민간부문은 40년으로 돼 있는 연금 분담기간을 2012년부터 41년, 2020년부터는 42년으로 늘리는 안을 추진 중이다. 이와 함께 60세로 이웃나라들에 비해 3~5세 가량 빠른 퇴직 연령을 좀 더 늦추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내가 왜 60이 넘어서까지 일을 해야 하냐"며 발끈하고 나섰고 옛 동독지역 노동자들도 근로시간을 옛 서독지역에 맞춰 줄여달라며 파업에 들어갔다.

박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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