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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윤구병의 '생계형 웃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와 변산공동체학교 대표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나마도 인터뷰가 정해지고 검색으로 살펴 본 거였다.

파주 출판단지로 가면서 취재기자가 물었다.
"전에도 만난 적 있지?”

"첫 만남인데요.”

"어떻게 이분을 한 번도 안 만났을 수가 있지?”
이 물음엔 당연히 만났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안 만난 게 의외라는 뉘앙스가 읽혀졌다.
그런데 처음이었다.

보리 출판사 입구에 도착하니 까만 얼굴, 거의 빡빡머리, 쑥색 개량 한복, 흰 고무신의 윤구병 선생이 바깥으로 나와서 맞아 줬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런데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까만 얼굴이라 더 도드라진 하얀 이빨의 웃음, 만난 적 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묘한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취재기자가 머리 모양이 수도승 같다며 운을 뗐다.
"지난해 진도 팽목항에서 머리를 잘랐어요. 강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 있어요. 그러니 저 또한 그 아이들에게 죄인입니다. 지은 죄에 대한 참회죠.”

학교에서 하나의 '정답'만을 가르쳐왔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남아 있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게 잘못 가르친 탓이라는 거였다.
당신도 한때 교육자였으니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죄책감 때문에 지금껏 머리를 짧게 하고 있다고 했다.
쑥색 개량 한복 왼쪽 가슴에 노란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건강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지난봄에 간암 판정을 받았어요.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니 이 정도 산 것도 드문 일이죠. 징글맞게 오래 살았어요. 병이든 교통사고든 이 나이에 죽으면 다 자연사니 병원 치료도 안 받습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윤 선생은 너무도 담담하게 답한다.
독감에 걸려도 죽을 정도라고 말하는 게 사람일 진데 어찌 이리도 담담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인터뷰 시작부터 세월호와 간암 이야기다.
직감적으로 오늘 사진은 무겁고 담담한 분위기로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후, 윤 선생은 한 술 더 떠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서야 생각이 났다.
어디서 본 듯한 그 얼굴, 중국화가 웨민쥔(岳敏君)의 그림 속 인물이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바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딱 그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들으며 웨민쥔의 그림을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잠깐 인터뷰 내용을 놓쳤다.
그때 윤 선생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내 얼굴을 한번 보세요. 뻐드렁니에 입이 툭 튀어나왔죠. 가만있으면 화내고 있다고 오해를 받아요. 그래서 웃습니다. 일종의 '생계형 웃음'이죠. 아프고 나서 더 많이 웃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겁고 담담한 분위기의 사진이 메시지라고 지레 판단을 했건만, '생계형 웃음'이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다. 이럴 때 답은 두 가지 다 찍어놓고 나중에 다시 판단하는 거다.

웬만큼 인터뷰가 진행되고 난 후, 웨민쥔의 그림을 윤 선생에게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정말 그림과 똑같이 웃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파안대소, '생계형 웃음'이 답이라고 그때 결정했다.
게다가 윤 선생이 한마디 덧붙였다.
"바보가 돼서 남을 즐겁게 해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인터뷰 후 출판사 구경을 시켜줬다.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선생님, 약도 안 드시면서 그 고통은 어떻게 참으시나요?”
암으로 고생한 가족이 있기에, 암으로 먼저 떠난 가족이 있기에, 그들의 고통을 지켜본 적 있기에 던진 물음이었다.

"이를테면 제 병이 간뎅이가 부은 거죠. 간뎅이가 부으면 아픈 줄도 몰라요.”
그 대답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무 말도 못했다. 그냥 웃는 척만 했다.

인터뷰 중 가슴에 박힌 윤 선생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나는 지금 행복해요. 그런데 티를 내기가 뭣해요.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 행복하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아요? 그래도 행복한 건 사실입니다.”

분명 당신 입으로 '생계형 웃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계형 웃음'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행복형 웃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잘못 판단한 걸까?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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