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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노트북을 부셔버릴(?)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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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신문의 사회면에는 각종 사건·사고가 실린다. “A씨는 최근 이용 차량을 바꾸면서 병원에 주차 등록 갱신을 몇 차례 요청했는데도 일 처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데 화가 나 노트북을 부셨다고 진술했다” “B교수는 피해자를 괴롭혀 온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과 직원들의 휴대전화를 모두 부셔버렸다” “이 중 한 명은 업소 내부에 있던 스피커와 선풍기, 테이블 등을 부셔 100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난 것으로 조사됐다” 등에서처럼 사건 기사 가운데는 ‘부셔’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부숴’로 고쳐 써야 한다.

 어떤 물건을 두드리거나 깨뜨려 못 쓰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는 ‘부수다’이다. 이를 활용하면 ‘부수어’, 줄여 쓰면 ‘부숴’가 된다. 따라서 위의 예문은 ‘부쉈다고’ ‘부숴버렸다’ ‘부숴’로 각각 바꿔 써야 바르다.

 ‘부셔’라고 잘못 쓰는 이유는 ‘부수다’와 ‘부시다’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부시다’는 그릇 등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릇을 물로 부셨다”처럼 쓸 수 있다. 또 “햇빛에 눈이 부셨다”에서와 같이 빛이나 색채가 강렬해 마주 보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부시다’도 있다. ‘부시다’에 ‘-어’를 붙여 활용하면 ‘부시어’, 이를 줄여 쓰면 ‘부셔’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부수다’를 피동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어지다’를 붙여 ‘부숴지다’로 하면 될까? ‘부수+어지다’ 형태인 ‘부수어지다’나 준말인 ‘부숴지다’로 쓰면 될 것 같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부숴지다’를 찾아보면 ‘부서지다’의 잘못으로 나와 있다.

 규칙대로라면 ‘부수어지다/부숴지다’가 돼야겠지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과거부터 어원적으로 이미 ‘부서지다(←븟어디다)’가 ‘부수다’에 대한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쓰이고 있으며, 또한 언중(言衆)이 실제 그렇게 발음하고 있는 것을 존중해 ‘부서지다’만 표준어로 인정했다고 한다.

김현정 기자 nom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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