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한 기업인의 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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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 정부가 조중동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지만 매일 신문 사설을 정해야 하는 입장에서 요즘처럼 곤혹스러운 때가 없다. 아무리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일지라도 자기나라 대통령을 매일, 혹은 하루 걸러 비판할 수는 없다.

우리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거듭된 비판은 자연인 대통령을 넘어 나라의 제도에 대한 국민적 충성심을 침식시키기 때문에 결국에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설회의 때가 되면 정부가 잘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찾지만 지난 1백일은 매일 다투는 일뿐이고, 새 정부 인사들의 설화(舌禍)를 처리하기도 바빴다.

*** 5 ~ 10년 뒤엔 뭘 먹고 살것인가

정말로 비전이 그리웠다. 꿈을 꾸고 싶었다. 나라가 이렇게 향방없이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비전을 보았다. 그것은 새 정부의 비전이 아니라 한 기업인의 비전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망설였다. 삼성과 중앙일보가 지금은 분리됐으나 과거의 유산 때문에, 또 요즘 문제되고 있는 삼성 편법증여 의혹 때문에 혹시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라를 위해 바른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10주년'이라는 회사 모임에서 나라 현실과 장래를 언급했다. 비록 짧은 기사였지만 눈이 번쩍 띄는 내용이었다.

그는 우리가 마(魔)의 1만달러 시대에 발목이 잡혀 있다며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선진국이 될 수도, 남미의 후진국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선진국과는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중국은 우리를 추격하고 있어 5~10년 뒤에는 먹고 살 산업이 바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제몫을 찾기보다 파이를 빨리 키워 2만달러 시대로 가야 한다"고 했다. 2만달러가 되면 의식주가 해결돼 노사문제나 집단 이기주의에 의한 혼란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현실 진단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긍하겠지만 2만달러 때까지는 '파이를 먼저 키우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입을 삐쭉거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가 제시한 수단을 보면 반대자가 더 많아질 것이다.

"천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의 1등 제품 50개만 만들면 국민이 먹고 살 걱정이 없으며 이를 위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망해도 함께 망하자며 하향평준화를 고집하는 나라에서 천재를 키우자고? 지금 있는 것을 나누어야지 파이를 키우자고? 요즘의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얘기가 있다. 누구나 그 거위를 죽인 바보를 비웃지만 지금 우리가 그 거위를 죽이고 있지는 않은지…. 러시아 속담이 있다. 어느 마을에 염소 한마리를 키워 젖을 짜 먹는 이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반의 염소가 부러웠다.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누구에게나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동네사람들의 소원은 놀랍게도 염소 한마리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반네 염소를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이러한 질시와 비꼬임으로 왜곡돼 있지는 않은지….

이런 분위기에서는 절대 2만달러 시대로 갈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며칠 전 2만달러 시대로 가는 개혁세력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개혁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 건지 분명치 않다. 걱정도 된다.

*** 파이 빨리 키워야 살 길 보인다

남미가 저 지경이 된 이유가 있다. 문화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하기보다 남의 탓을 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종속이론 때문이었다. 못사는 것이 미국과 기업인의 착취 때문이라고 부추겼다. 포퓰리즘만 횡행하여 빚을 내 나눠 먹었다. 대신 일은 적게 하자는 주의였다.

우리는 남미와 대조되는 나라였다. 경제발전에 귀감이 되는 나라였다. 문화 덕분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 자녀 교육시키고…. 그 문화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은 남미로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정치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기업이 비전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한 기업인의 비전이 전국민의 비전이 될 수도 있다. 누구의 비전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른 비전이라면 모든 국민의 목표가 될 수 있도록 북돋워야 한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