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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후 모든 새로운 것은 구질서에 대한 반란에서 잉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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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25면

1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 (1861~1947).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관념의 모험』에서 인권에 대한 사유가 세대를 걸쳐 진화해서 새로운 민주사회의 질서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모든 새로운 것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새로운 사회의 질서로 정착하게 된 계기를 만든 것은 바스티유 감옥에서 탈취된 무기가 아닌 100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인권에 대한 관념의 진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회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적인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성숙한 사유라 할지라도 관념과 실재 사이에는 두터운 장벽이 있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야 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2 1789년 7월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됐다.

빅뱅(Big Bang) 당시의 초기 우주는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균일한 우주였다. 137억년이 흐른 현재의 우주는 텅 빈 곳도 있지만 은하와 별들이 탄생하는, 밀도가 높은 곳도 함께 공존하는 비균질한 우주가 됐다. 초기 우주의 균일한 질서가 무너지고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되는 우주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 진화하는 것처럼 태초의 요동이 생겨나 진화했고, 한 순간의 혁명적인 사건에 의해 그 요동이 우주의 새로운 질서로 정착된 것이다. 이 우주 초기의 역사는 알란 구스가 1970년대 말에 제안했고, 폴 스타인하트, 안디 알브레흐트 그리고 안드레이 린데 등에 의해서 1980년대 초에 완성된다.

3 우주의 역사.

4 허블 우주망원경으로촬영한 우주. 은하와 별, 생명이 탄생하는 우주의역사도 인간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주 역사도 인간 역사와 다르지 않아먼저 인권에 대한 관념이 진화하듯이 균일한 우주에 균열을 만들 수 있는 밀도의 요동이 진화하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모든 인간이 인권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던 때부터 이미 시작됐다. 노예 없이는 사회가 유지가 될 수 없던 당시에는 인권에 대한 사유가 생산과 분배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사유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존엄에 대한 관념이 진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역사에서도 초기의 균일한 우주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요동 현상의 씨앗은 이미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20세기에 우리는 미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시세계에서는 가장 낮은 에너지 준위가 영(0)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지점이지만 진공의 에너지 준위가 영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은 여전히 그 무언가의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은 아주 흥미있는 미시세계의 현상과 연관된다.


솥에 물을 담아 놓는다. 물의 온도가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물의 평균 수위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에 끓는점에 가까운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면 수면 위에 요동이 생길 것이다. 평균 수면보다 위로 솟구치는 곳도 있고, 그 영향에 의해서 주변의 수면보다 더 낮아지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 평균 수면의 높이가 변화하지 않을 뿐이다. 흔히 양자화된 영역이라고 불리우는 미시세계에서는 끓는 수면 위의 높낮이 현상과 같은 요동이 항상 일어난다.

5 잔잔하던 물도 끓어오르면서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생긴다. 태초의 양자 요동으로 균질하던우주에서 밀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생겨났다.

균일한 우주 질서를 뒤흔든 양자요동그렇다면 초기의 균일한 우주에 이러한 양자요동이 존재한 이유가 무엇일까?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물리적인 거리가 점점 좁혀지게 되고, 현재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전 우주가 양자화된 미시세계의 영역 내부에 밀집되는 시기가 반드시 존재하게 된다. 전체적인 우주의 밀도가 균일하더라도 지역적으로 생겨나는 양자요동 현상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인권에 대한 관념이 기존의 질서 속에서 태동한 것처럼, 밀도의 요동의 균일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생겨나게 된 과정이다.


하지만 노예제 사회에서 인간이 현실적으로 평등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균일한 초기 우주의 양자화된 영역에서의 요동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고전역학적인 영역으로 우주팽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측될 수 없는 현상으로 사라져 버린다. 인권에 대한 관념의 진화가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로 정착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혁명처럼, 우주의 역사에서도 태초의 양자요동이 기존의 균일한 우주의 질서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무언가 혁명적인 현상이 존재해야 했다.


이 현상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태초의 급팽창 현상(Inflation)이고, 나는 이것을 중력에 대한 반란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서 끓는 물의 수면 상에 있는 요동을 있는 그대로 남기고 싶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만일 물의 온도를 서서히 낮추게 되면 수면 상의 요동이 사라지고 잔잔해진다. 그런데 만일 순간 냉각기가 있다면, 물이 끓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솥을 냉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존재했던 수면 위의 요동이 그대로 얼음의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우주에 냉각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현상을 팽창하는 우주에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물리적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인과적인 지평선까지의 거리는 유한하다. 만일 그 지평선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을 순식간에 지평선 밖으로 밀어내 버릴 수 있다면, 끓는 물 위의 요동이 얼어버리는 것처럼 양자요동의 흔적도 지평선 밖에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지평선 너머로 간 태초의 양자요동그런데 문제는 중력은 항상 끌어 당기는 힘만 있다는 것이다. 팽창하는 우주의 내부에 있는 물질의 질량에서 생기는 중력의 방향은 팽창하는 우주의 반대 방향으로 끌어 당기는 작용만을 한다. 정상적인 우주에서는 양자요동을 지평선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급팽창이 생길 수가 없다. 따라서 중력 현상에 충실한 정상적인 팽창만을 했다면, 이 우주는 영원히 균일했을 것이고 생명이 탄생할 수 없었다.


알란 구스는 대략 빅뱅이후 10-32 초가 되는 시점에서 중력에 대한 반란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인플라톤(inflaton)이라고 불리우는 이 물질은 빅뱅 당시에는 다른 물질처럼 중력현상을 따르는 물질이었지만, 우주가 냉각하는 과정에서 반중력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로 전이하게 된다. 즉 팽창하는 우주를 방해하는 인력이 아닌, 오히려 팽창하는 우주의 속도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반중력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태초의 양자요동이 순간적으로 인과론적인 지평선 너머로 확장되어 요동 현상이 지평선 밖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있다.


시간이 흘러 반중력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우주는 정상적인 팽창을 하게 되고 지평선 밖에 얼어 있던 요동이 지평선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이 때 얼어 있던 양자요동의 계곡에 해당하는 곳으로 물이 고이듯이 주변의 물질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이렇게 미세한 고밀도 지역이 여기저기에서 성장해 오늘날 은하와 별들이 탄생할 수 있는 곳으로 진화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벌어졌던 프랑스 혁명이 1000여 년간 진화해 오던 인권에 대한 관념을 새로운 민주사회의 질서로 전환한 것처럼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순간 벌어진 중력에 대한 반란이 태초의 양자요동을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비균질한 우주의 씨앗으로 전환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러한 중력에 대한 반란이 정말 태초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까지 관측된 모든 간접적인 증거들이 태초의 중력에 대한 반란을 증언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빅뱅 이후 30만년이 되는 시점까지는 태초의 안개가 모든 정보를 묻어 버린다고 했다. 바로 이 반중력 현상이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중력파를 관측하는 것인데 2014년 4월 경 이 태초의 중력파를 관측했다는 보고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제기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 하지만 곧 태초의 신호가 아닌 은하 성간물질에서 나오는 노이즈로 판명되었다. 과연 이 태초의 중력에 대한 반란이 정말 우주의 역사에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 열려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됐다.


송용선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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