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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긴 여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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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6 면

피아니스트 백건우(69)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기교파와는 거리가 먼, 구도자와 같은 연주자’라는 생각이다. 꼭 60년 전 백건우의 등장을 생각해보면 이 생각은 틀렸다. 당시 만 9세이던 백건우는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국립교향악단과 전 악장을 연주했다. 당시 그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어려운 곡을 열 살도 안 돼 흠없이 연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그 협주곡은 피아니스트들이 기교를 과시하는 낭만주의의 핵심 작품이다.


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백건우는 6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데뷔 연주 때 그리그 협주곡이 어렵지 않았나”란 질문을 받고서다. “뭐, 그렇게 어려웠던 기억은 없고, 아버님이 곡을 정해서 치라고 했기 때문에….” 데뷔뿐 아니다. 11세엔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했다.


백건우의 ‘구도자’ 이미지는 작곡가ㆍ작품 선택 때문에 생겼다. 그는 흔히 연주되는 작품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주 곡목을 만들어 나갔다. 1973년 라벨 전곡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 청중에게 인기를 끌고 싶었다면 다른 작곡가를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후엔 리스트ㆍ스크리아빈ㆍ프로코피예프 등 작곡가 한 명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연주자인 동시에 연구자의 행보였다.


그러나 데뷔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신동’이라는 칭호와 함께 출발한 연주자다. 만일 마음을 먹었다면 화려하고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더 대중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한적하고 외로운 길을 선택했다.

백건우는 독특한 방식으로 연주를 준비한다. 베토벤 협주곡을 한 곡 연주할 때면 나머지 네 곡을 모두 훑어본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건 한 곡이지만 나머지 네 곡에 대한 연구가 연주의 바탕이 된다. 이유를 묻자 “작곡가를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어느 한 곡도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공부는 느리고 길다. 연주를 앞두고는 작곡가와 관련된 악보ㆍ음반 뿐 아니라 책ㆍ영상 자료까지 섭렵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손녀를 만나보니 소나타 1번 2악장의 따뜻함이 더 잘 이해가 되더라”는 식이다.


백건우가 속도를 늦춘 것은 이처럼 의도적이다. 화려하고 대중적인 연주로 빨리 성공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음악은 긴 여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60년을 연주했지만 아직도 발굴하고 소개해야할 피아노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점에서만큼은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느리고 꼼꼼한 연구ㆍ연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데뷔 60년이고 칠순을 일년 앞둔 백건우는 이달 국내 독주회에서 러시아 작곡가들을 소개한다. 그는 “국내 연주를 할 때는 어떤 작품을 꼭 소개하고 싶어서 프로그램을 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1번이다. 2번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이 러시아 교향곡의 매력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했다. “한때 러시아 음악에 빠져 전세계의 러시아 음악 악보를 구하러 다녔다”는 백건우다. 이번 무대 또한 오랜 고민과 연구가 빚어낸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올해로 서거 100주기인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의 전주곡 24곡도 함께 연주한다. 22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글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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