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전(1)] 김정남 선택이 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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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평양 롤러스케이트장 시찰에 김정은과 동행한 장성택이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제공=노동신문]

북한 현대사에서 장성택(1946~2013)만큼 스토리가 많은 사람이 없다. 김일성의 사위, 김정일의 매제, 김정은의 고모부. 북한에서 ‘신(神)’으로 모셔지는 김씨 부자들과 이런 관계가 그의 인생을 대변한다. 공식 직위인 노동당 행정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후보위원은 장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씨 부자와의 이런 관계가 그에게는 ‘독’이 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와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무병장수의 최고 비결이다.

장성택은 김씨 부자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신의 ‘착한 면’만 보아야 하는데 ‘추악한 면’까지 봤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고 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아담이 열매를 따 먹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 북한 고위 인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김씨 일가에 들어온 장씨가 김씨가 되려고 하다가 제거됐다”고 평가했다.

장성택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1942~2011)을 보면서 그의 사후를 고민했다. 당시 장성택은 당 행정부장에 있었다. 김정일은 2007년 말에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 등 국가의 공안을 총괄하는 행정부장에 장성택을 앉혔다.

장성택의 머리 속에는 어린 김정은 보다 13세 많은 그의 이복형 김정남이 그려져 있었다. 장성택은 배포가 크고 1995년 이후 베이징에서 생활하면서 터득한 개혁·개방에 대한 마인드를 가진 김정남을 좋아했다. 장성택은 북한이 3대 세습으로 이어지면 민심이 동요하고 국제적으로 망신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북한이 두 차례의 핵실험 이후 거듭되는 유엔 제재 속에서 살 길은 개혁·개방을 서두르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성택은 김정남을 선택한 것이다.

장성택은 김정남이 어릴 적부터 귀여워했다. 장성택·김경희 부부는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1937~2002)이 1974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요양하자 그를 키우다시피 했다. 자식이 없었던 김경희는 조카 김정남을 아들처럼 아꼈다. 그래서 김정남의 중국 생활비를 부담하고 베이징과 마카오에 저택을 사 주기도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에게 틈날 때마다 김정남 얘기를 설명했다. ‘장자 상속론’을 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남은 후계자로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정일이 일종의 ‘바람’을 피워 나은 자식이라 유교적 전통이 강한 북한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장성택은 자신의 권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착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김정은이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은이 2000년 8월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자신에게 ‘제왕학’을 가르쳐 준 사람이 ‘딴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김정은은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이 생각났을 것이다. 자신을 후계자로 밀어줄 것으로 굳게 믿었던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이 배다른 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밀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600여년 전의 이방원에 감정이입이 됐다.

김정은의 눈에는 아버지가 쓰러진 뒤 ‘김정일 대리인’으로 행사하는 장성택이 정도전으로 비쳐졌다. 오래전부터 장성택의 ‘욕심’을 알고 있던 김정일은 사망하기 전에 김정은에게 “네가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장성택을 살려 두어라”라고 당부했다. 어린 김정은이 권력을 공고화하기 이전까지는 장성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격이 급한 김정은은 그때까지 참지 못했다. 그리고 2013년 12월 12일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ssk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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