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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어린이집서 거절, 뽀로로 가방 메고 방에서 노는 디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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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린이집에 가고 싶은 디누리(3)는 종일 컨테이너 안에서 뽀로로 가방을 메고 지낸다. 엄마는 디누리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세 곳을 들렀으나 “(국적이 없는 디누리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

전북의 젖소 농장 옆에 놓인 컨테이너 한 칸. 스리랑카 출신 부모를 둔 디누리(3·여)는 태어나서 이곳을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다. 여느 한국 어린이들 같으면 어린이집에 갈 나이. 하지만 디누리는 숨어 살다시피 한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여서다. 한국에서 태어난 디누리는 출생신고도 못했다. 국적이 없는 아이다.

 디누리는 종일 컨테이너 안에서 인형 놀이를 한다. 등에는 뽀로로 가방을 메고 있다. 엄마(37)는 “한두 번 밖에 나갔다가 또래 아이들이 메고 다니는 걸 보더니 가방을 사달라고 졸라서 저러고 있다”고 했다. 큰맘 먹고 디누리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도 했다. 세 곳을 가봤지만 모두 거절했다. 출생 기록이 없는 디누리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보험을 들 수 없고, 또 한국 부모들이 알게 되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그런 디누리의 친구는 인형, 그리고 스리랑카 동요를 들려주는 낡은 컴퓨터 한 대다.

 경기도 수원시에 사는 굴자리나(6·여)는 지난해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낯선 목소리가 들리면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린 뒤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본다. 지난 6월에 이어 7월 중순 두 번째 기자가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기자의 목소리에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엄마(43)가 “지난번에 본 아저씨”라고 하니 그제야 얼굴에 살짝 웃음이 감돈다. 엄마는 “단속반이 오지 않는지 부모가 경계하는 걸 아이가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굴자리나의 부모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불법체류자이고, 굴자리나는 무국적 아이다.

 국적 없는 아이들은 이렇게 숨어 지낸다. 원칙적으로 어린이집 같은 보육기관이나 의무교육인 초·중학교에는 갈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불법체류자인 게 드러날 수밖에 없어 가기를 꺼린다. 국제아동보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의 임세와 장권리옹호부 과장은 “설혹 큰맘 먹고 학교를 찾아가도 나중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까봐 학교 측이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앤(17·오른쪽)과 시드니(14) 자매는 한국에서 대학에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종교단체가 세운 비인가 교육기관에 다닌다. 졸업장을 받아도 부모의 나라 방글라데시에 가면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무국적·불법체류 청소년들 상당수는 사회·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비인가 교육기관에서 공부한다. 경기도에서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 다니는 앤(17·여)이 그렇다. 부모가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체류자라 여기에서 공부하게 됐다. 고교 과정인 수학·과학·사회·영어와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종일 공부했다. 그러던 앤은 올 초 실의에 빠졌다. 비인가 학교라 졸업장을 받아도 고국에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다.

이주원(17)군은 고교에 진학했지만 스마트카드 학생증이 아니라 종이에 손으로 쓴 학생증을 받았다.

 이런 친구들에 비하면 이주원(17)군은 행운아다. 키르기스스탄 피가 흐르는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닌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지난 4월 친구들이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가지 못했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주원이는 “수학여행 못 간 게 아쉽지만 더 안타까운 게 있다”고 한다. 자원봉사를 못하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를 인터넷에 등록해야만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서다. 이군이 반문했다. “요즘 자원봉사를 하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꿈이 건축 디자인인데….”

 국적 없는 아이들의 가정이 겪는 또 하나의 큰 고통은 병원 가기다. 이용하기가 만만찮다.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다. 상태가 위중해 입원을 해야 할 정도면 병원에서 ‘보증금’을 요구한다.

 부모가 우간다 출신인 엘리안(2·여)이 그랬다. 지난해 태어난 지 두 달 되던 때의 일이었다. 열이 펄펄 끓어 동네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는 “급성폐렴이고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무과에서 난색을 표했다. 건강보험이 안 되니 100만원을 먼저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리안은 병원 로비에서 6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원할 수 있었다. 50만원을 내고, 엄마가 도움을 청해 달려온 시민단체가 입원비 보증을 섰다.

원빈(4)은 천식을 심하게 앓는다. 국민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한 달에 수십만원을 병원비로 쓴다. 베트남 출신 불법체류자인 엄마는 “임신 때 약값 걱정에 영양제를 제대로 먹지 않아 아이가 천식에 걸렸다”고 자책했다.

 역시 무국적 아이인 원빈(4·부산시 서대신동)은 천식을 심하게 앓는다. 한 달 치료비가 50만~60만원이다. 지난 5월엔 발작을 일으켜 일주일간 입원하고 170만원을 냈다. 베트남에서 온 엄마(42)는 “임신 때 영양제를 잘 안 먹은 탓에 아이가 아픈 것 같다”며 가슴을 친다. “나 같이 불법인 사람은 영양제 값이 합법인 사람의 두 배가 넘어서….”

문정양(5)은 태내 감염 때문으로 추정되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엄마는 임신 정기검진을 받지 못했다.

 문정양(5·경기도 안산시 선부동)군은 희귀병을 앓고 있다. 뇌에서 단백질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병이다. 눈앞 50㎝ 정도밖에 볼 수 없을 만큼 시력이 나빠졌다. 다리는 팔보다 가늘어 제대로 걷지 못한다. 의사는 “태아 때 감염된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엄마 소보연(39·중국)은 임신 때 산부인과 정기검사를 받지 않았다. 돈도 부담이고, 또 불법체류자임이 드러날까봐서다.

 지금 정양이를 치료하는 데 매달 몇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부모 벌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합법 체류자인 두 고모와 사촌 형까지 치료비를 보탠다. “중국에 돌아가 치료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니 “그곳은 한국보다 더 비싸고, 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와 도움을 줄 사람도 없다”고 했다.

 정양이 엄마는 불법체류가 드러났지만 아들 치료 관계로 당분간 한국에 있을 수 있게 됐다. 지금 임신 7개월이다. 이번에도 정기검진을 제대로 받지 않고 있다. 엄마는 말했다. “검진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장 정양이 치료비를 친척들에게 신세지는데….”

◆특별취재팀=최종권(팀장)·임명수·조혜경·김호·유명한 기자, 이성은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사진=신인섭·오종택 기자, 프리랜서 오종찬·김성태, VJ=김세희·김상호·이정석, 영상편집=정혁준·김현서, 디지털 디자인=임해든·김민희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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