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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수권자의 암살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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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선한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에 나오는 장면이다. 대통령인 제드 바틀릿이 새벽 1시에 집무실에 있는데 비서실장인 레오 맥게리가 불쑥 들어선다. 한 중동 국가인 쿠마 국방장관인 압둘 샤리프의 방미(訪美)를 허용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샤리프가 테러 조직의 수괴로 여러 번 테러를 벌였고 또 벌일 계획이란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레오가 말한다.

 “쿠마와 전쟁을 벌이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일 수 있지만 샤리프를 못 잡는다. 좀 더 지적이 되자. 진보주의자인 당신은 도덕적 절대원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있다.”

 “그런 거 없다.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앞으로도 더 죽일 게다. 우리가 그를 끝장내야 한다(암살하자는 의미).”

 “군주론 은 늘 악행을 정당화한다.”

 “이건 정당한 일이다. 또 필요한 일이다. 샤리프를 오게 하자. 우리에겐 옵션이 생긴다. 그가 안 오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바틀릿은 괴로워한다. 백악관에서 샤리프가 악수를 하자며 내민 손도 못 잡는다. 그러나 결국 암살을 결정한다.

 이를 길게 인용한 건 영국 때문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의회에 출석해 ‘이슬람국가(IS)’ 대원인 영국인을 드론으로 사살하도록 명령했다고 공개했다. 엘리자베스 2세 등이 참석한 행사에서 폭탄을 터뜨리려 한 혐의다.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검토했는데 제지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했다.

 캐머런 총리는 발언 도중 주어를 ‘나’로 바꾸곤 이같이 말했다. “우리의 거리에서 테러가 벌어진 후 여기에 서서 막을 수 있었고 막을 기회도 있었는데 그걸 왜 살리지 못했는지 해명할 준비가 나는 돼 있지 않다.” 최악을 상정할 만큼 홀로 고뇌했다는 얘기다.

 이번 암살 명령으로 그는 영국 현대사에서 자국 군을 동원해 자국민을 사살한 첫 총리가 됐다. 역사가 이어지는 한 그 수식어는 떨어지지 않는다. 살인이란 인간적 가책 이상의 역사적 책임이다.

 국가지도자들은 옳건 그르건 유사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아덴만 작전을 앞두고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고 토로한 대목이 나온다.

 우린 대통령에게 임기 초엔 지나치게 관대했다가 말엔 지나치게 박해지곤 한다. 그렇더라도 역사 앞에 홀로 선 고독한 결단자란 본질 자체는 잊지 말자. 지금 대통령이 매우 고독할 뿐만 아니라 범사(凡事)를 다 결단하려 해 우리에게 더 절실한 덕목이다.

고정애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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