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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암살’은 로마 공화정 종식시킨 전형적 교각살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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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 28면

1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56분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에서 박관용 국회의장(가운데)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의 가결을 선포한 뒤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최근 행정자치부 장관의 선거 관련 건배사를 두고 야당이 탄핵소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1969년 9월 6일에도 탄핵소추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은 점, 탄핵심판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점, 대통령과 정부의 진퇴 문제를 국무회의 의결 없이 국민투표에 붙인 점 등이 위헌이라는 사유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야당이 제출한 것이다. 이 탄핵소추안은 3선 개헌이라는 큰 변화에 묻혀 흐지부지됐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사례는 현재까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것이 유일하다. 2004년 3월 야3당이 국회 경호권을 발동해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던 것이다. 통과를 막기에는 의석 수가 부족해 의사당 단상을 점거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에 망연자실했다. 이와 달리 야당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생각했고,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6대 국회 만세” 등을 외치면서 환호했다.

2 탄핵소추안 가결에 낙담하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 [중앙포토]

 후폭풍 거셌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그러나 한 달 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3당은 많은 의석을 잃었다. 특히 탄핵소추를 주도한 62석의 새천년민주당은 9석만을 얻어 몰락했다. 이에 비해 열린우리당은 과반의 의석을 획득했다. 또 한 달 후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노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2004년 1월부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대통령 탄핵 가능성을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증대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노 대통령은 선관위 결정을 존중하지만 동의하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야당은 노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대응했다.


이런 상황 전개는 대통령과 야당에 의한 일련의 선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야당)탄핵 추진 가능 언급→(대통령)여당 지지 호소→(야당)대통령 사과 요구→(대통령)사과 거부→(야당)탄핵소추안 발의→(대통령)강경 발언→(야당)탄핵소추안 가결→(유권자)여당 선거승리 →(헌법재판소)탄핵심판 기각.


이런 다단계 선택 상황에서는 최종선택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따져보면 최선의 전략을 계산할 수 있다. 즉 국민 다수가 탄핵에 찬성할 때의 헌법재판소 선택, 그리고 국민 다수가 반대했을 때의 헌법재판소 선택을 먼저 추정해야 한다. 당시 대통령 파면 결정을 선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법리적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국민 다수가 탄핵에 반대한다면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할 것으로 보였다.


국민여론은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비율이 찬성 비율보다 높았다. 반면 대통령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불필요하다는 비율보다 높았다. 대통령 사과가 필요하지만 탄핵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다수의 생각이었다. 야3당은 국민 다수가 탄핵소추에 반발하고 또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기각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이 점차 늘어나고 또 헌법재판소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집단 내에서만 소통하고 집단 밖과의 소통을 소홀히 할 때 오판을 범하기 쉽다. 이는 같은 집단 내에서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집단사고(groupthink)에 의한 오판으로 불린다. 그러다 보니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야당 의원들은 불안한 기색 없이 만세를 불렀고, 의장석 확보 작전이 기발했느니 또 점괘로 표결 날짜를 잘 잡았느니 하는 논공행상까지 나왔다.


완력을 동원한 야당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무모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야당은 당시 소수 의석을 가진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정상적인 국회운영이 되지 않음을 보여줘 곧 실시될 총선에서 의석 확보를 추구했어야 했다.


 탄핵 추진 세력의 어설픈 전략의 결과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거세지자 노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탄핵소추를 유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사과를 거부하면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다. 설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고 하더라도 그 함정은 상대에게 숨겨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자기 패만 알고 남이 가진 패를 모르면서 진행된 게임이 아니었다. 상대방 패를 서로가 다 잘 아는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의 정략에 당했다는 주장은 스스로 상황판단에 문제가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노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통과 직후 “지금 이 과정은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괴롭기만 한 소모적 진통은 아닐 것”이라고 발언했다. 노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소추가 상식적으로 부당하다고는 생각했을 것이고, 또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을 기각할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해 국정을 운영하고 싶지만, 탄핵 후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이라곤 확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 대통령 탄핵소추는 노 대통령의 계산된 전략이라기보다 탄핵 추진세력의 어설픈 전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야당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결국 ‘소를 죽게 만들 쇠뿔 바로잡기’, 즉 교각살우(矯角殺牛)였고, 노 대통령에게는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당장의 어려움’, 즉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스포츠든 게임이든 사업이든 정치든, 자신이 잘해서 이기는 경우보다 상대가 실수해서 이기는 경우가 더 많다.

카이사르 암살 2년 뒤 빌립보 전투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자 자결하는 공화파 리더 브루투스(헤르만 보겔 그림).

 쪽박 회피 공식 있지만 대박 보장 공식 없어교각살우와 전화위복은 종종 관찰된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부산의 한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환호하는 원로원 공화파 의원들(장 레옹 제롬의 그림).

음식점에 몇 명의 공공기관장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관권선거를 조장하고 추진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화가 오고갔다.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측에서 이 대화를 도청해 공개하였다. 공개 직후 김영삼(YS) 후보의 당선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YS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실제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그 사건이 오히려 YS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나오게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관권선거 대화의 공개는 정 후보에게 교각살우이었고 YS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4년에 발생한 카이사르 암살도 마찬가지였다. 암살 직후 원로원 공화파들은 거사 성공에 흥분했고, 공화국을 수호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민의 반발과 카이사르파의 결집으로 수세에 몰려 모두 죽임을 당했거나 자살했다. 카이사르 암살은 로마 공화정을 바로잡으려다가 결과적으로 공화정을 종식시킨 전형적인 교각살우의 예다. 반면에 카이사르 상속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전화위복이 돼, 그는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민주 사회에서 성공의 관건은 대중의 마음을 읽는 데에 있다. 대중 마음 읽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기작을 만든 제작팀이 연이어 히트작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대중예술 전문가들이 기획했다는 영화·드라마·음악 가운데 대중의 반응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해 흥행에 실패한 건은 허다하다. 쪽박이나 리스크를 피하는 공식은 있어도 대박 혹은 흥행을 보장하는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적 시장 조사를 거친 후에 출시한 신제품이 실제 시장에서 실패한 사례도 많다. 전문적 조사와 예측은 성공 가능성을 높일 뿐이지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교각살우가 될지, 전화위복이 될지 모를 때에는 차라리 진정성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교각살우의 가능성을 낮추고 전화위복의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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