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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야만이 판치는 스마트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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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물놀이 시설의 여성 탈의실과 샤워실에서 경찰관이 잠복근무를 한다. 이달부터는 실내 수영장과 찜질방도 경찰이 단속한단다. ‘워터파크 몰카’ 충격 이후 경찰청이 나름 성의 있게 내놓은 몰카 단속 후속조치다. 원래 세상은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여성 전용 공공장소마저도 이젠 안전하지 않게 됐다. 디지털 카메라가 훔쳐보기 때문이다.

 디지털 문명은 여성의 성(性)을 모욕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디지털 카메라는 화장실과 샤워실, 치마 속까지 마구잡이로 파고든다. 어느 시대에나 여성에 대한 모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처럼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무차별 다수를 공격하는 건 또 새로운 현상이다. 더욱 무서운 건 ‘범죄의 일상화 혹은 평범성’이다. 범죄와 무관할 것 같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른다.

 지난주엔 진료실에서 상습적으로 환자 몰카를 촬영했던 산부인과 의사가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명문대 교수와 대학원생, 회사원, 학생 등 잡고 보면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범인이다. 몰카 검거율은 97%에 이른다. 경찰관들은 몰카범들이 허술하고 소심한 사람이 많아서 쉽게 잡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들까지 범죄자가 되는 걸 보면 허탈하단다. 단지 스마트폰 하나를 손에 쥐었을 뿐인데, 이들은 범죄와 일탈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디지털 문명은 호기심만으로도 자신과 타인을 파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최근 세계를 발칵 뒤집은 애슐리매디슨 해킹 사건은 자기 파괴의 전형적 사례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을 만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릭 한 번 한 죄로 최소 2명이 자살하고, 400명의 북미 종교지도자가 사직을 하게 생겼다.

 디지털의 무한 복제 기능은 기념으로 남긴 셀카로 자신의 목을 조이는 상황도 빈번하게 연출한다. 홍콩 배우 진관희 셀카 유출로 10여 명의 여배우 가정이 파탄 났고, 최근 할리우드 배우들도 셀카 해킹으로 지옥문을 넘나든다. 네티즌들은 클릭과 퍼나르기, 간섭과 댓글로 타인의 사생활을 공격하는 공범으로 가담한다.

 우리는 처음 디지털 기술로 스마트 시대를 열었을 때 “세계가 서로 소통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합리적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는 인간 군상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끔찍하다. 천박한 욕망과 파괴적 본성과 같은 야만성을 드러내고 인간성을 파괴하며 범죄를 대중화하는 ‘기술 디스토피아’로 달리는 중이다.

 한데 생각해보면 원래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적·사적 생활에서 다면성을 지닌 존재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적 생활에선 인격·인품·교양으로 무장을 하고 자신을 단속하지만, 사적 영역에선 온갖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켜야 인생이 제대로 굴러가게 돼 있다. 원래 동물적 본능이란 아름답고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본능이 얽혀 있는 사적 영역은 가리고 숨겨야 세상이 깨끗해진다. 뒷간에서만 배설을 해야 길거리가 깨끗해지듯 말이다.

 한데 디지털 기술은 공사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물어뜨린다. 개인 기기로 혼자 앉아서 노는데 기기가 타인과 통해 있으니 공사가 엉켜버리는 것이다. 디지털 세상은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며 관음증적 본능을 충족시키고, 홀로 기계와 마주앉아 저열한 분노를 배설하도록 꼬드긴다. 더불어 내 사생활도 만인 앞에 퍼날라 내던지는 것이다. 완전히 공개된 공간이면서 사생활의 탈을 쓰고 있어 헷갈리게 하는 바람에 평범한 사람들이 부나방처럼 범죄에까지 몸을 던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 문명이 등장하면 혼란이 따른다. 혼란의 과정을 통해 우린 디지털 문명의 본질은 인간의 사적 영역을 말살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디지털은 우리가 여전히 문화인으로 살 수 있는지 시험하는 도전적 상황이 됐다. 디지털 문명 속에서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응전 방식을 찾는 것. 이게 우리 시대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