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타산책] 첫 여성 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 첫 여성 촌장의 당당한 모습. 이에리사 촌장이 태릉선수촌 개선관에 걸려 있는 역도선수 김태현과 장미란의 대형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종근 기자

▶ 탁구 대표팀 현정화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에리사 촌장. 박종근 기자

지난 13일 찾은 태릉선수촌은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화를 기다리는 목련과 철쭉처럼 새 촌장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왕년의 탁구 여왕 이에리사(51)용인대 교수가 최대 600명의 입촌 선수, 68명의 직원을 지휘하는 제17대 촌장으로 부임한 것이 지난달 28일. 1966년에 설립돼 40년 역사를 지닌 이 마을에 여성 촌장은 처음이다. 그래서 선수촌은 한 가지 일이 더 늘었다. 남자 숙소에 있던 촌장 숙소를 여자 숙소로 옮기는 작업이다.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에리사'란 이름은 가톨릭 영세명인가. 하지만 그는 개신교 신자라고 했다. 이 촌장은 "언니들이 이름을 지어줬다"고 말했다. 이 촌장은 54년 3남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큰언니와의 나이 차가 16살이나 됐다. 그런데 태어나기 2년 전인 52년에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이 촌장이 태어나자 당시 여고생이었던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부모님께 "동생 이름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을 따서 특이하게 짓자"고 제안했고, 부모님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셨단다.'이엘리자베스'는 너무 길었고, 그래서 줄인 이름이 '이에리사'였다. 언니들이 여동생의 이름에 영국 여왕의 영예를 얹어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 강해=이 촌장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대전시 부시장을 지낸 고 이승규씨다. 어렸을 때 이 촌장은 당연히(?) 왈가닥이었다. 동네에서 남자애들과 어울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고 놀았다. 운동을 좋아했고, 유난히 승부욕이 강했다. 그러나 부모는 운동을 하고 싶어하는 딸이 못마땅했다. 언니와 오빠들이 더 반대했다. 탁구를 하고 싶었던 이 촌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구슬치기를 해서 딴 구슬을 다시 아이들에게 팔았다. 그 돈으로 라켓을 샀다. 부모님을 졸라 대전 대흥초등학교 4학년 때 탁구선수가 됐다. 지금도 올드 팬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라예보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영여중 3학년 때 국내 정상에 오르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승승장구. 73년, 19세 소녀 이에리사는 선배 정현숙.박미라와 한 팀을 이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컵을 조국에 안겼다. 한국 구기 스포츠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단체전에서 19전 전승을 거둔 이에리사는 개인전 우승도 유력했으나 스웨덴의 라드베리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2관왕은 놓쳤다. 하지만 세계랭킹 2위까지 올랐다.

◆변화가 느껴지는 태릉=간부회의에 이어 일본 NHK방송사의 인터뷰, 그리고 선수 식당과 훈련장 시찰이 계속됐다. 대단히 바쁘다. 이 촌장은 누구보다 선수촌을 잘 아는 사람이다. 중3 때인 69년에 처음 선수촌과 인연을 맺은 후 선수와 지도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촌장이 되어 선수촌에서 산다.

이 촌장은 부임하자마자 두 가지 일을 벌였다. 첫째는 20평 정도의 촌장실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방문객에게 중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태릉선수촌은 앞으로 크게 변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둘째는 선수들의 예절교육을 계획 중이다. 우선 18일 오전 9시부터 전문 강사를 초빙해 90분간 특강을 준비했다. 그는 "여기는 10대부터 30대 기혼 선수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머물고 있다. 재충전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촌장은 "이곳에서 오래 지냈기 때문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시대에 맞는 의식구조의 변화가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선수촌 식구들도 반기는 모습이다. 김종덕 훈련부장은 "주방 아주머니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등 누나처럼, 엄마처럼 식구들을 대해줘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일과 결혼했다"는 새 촌장의 등장과 함께 이뤄지고 있는 태릉선수촌의 변화는 탁구공이 오가는 것만큼 빠르게 느껴졌다.

성백유 기자 <carolina@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이에리사는

▶출생=1954년 8월 15일 대전

▶가족=고 이승규.조춘식(89)씨의 3남5녀 중 일곱째. 미혼

▶학교=서울 문영여중-서울여상-명지대-명지대 체육학 박사

▶주요 성적=1970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주니어부 개인단식 우승, 72년 제15회 스칸디나비아오픈 단.복식 우승, 73년 사라예보 세계대회 단체전 우승, 76년 제28회 서독 국제오픈 단.복식 우승

▶주요 경력=84년 국가대표 여자팀 코치, 87년 국가대표 여자 감독, 88 서울올림픽 감독, 현대백화점 감독(94~99년), 2004 아테네 올림픽 감독, 용인대 교수(현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