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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서, 쟁점마다 김정은 훈령 직접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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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평도 해안 경계작전 해병대 장병들이 23일 새벽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안에서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22~23일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어졌지만 북한 잠수함 전력의 70%인 50여 척이 기지를 벗어난 것으로 밝혀져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이탈률은 6·25전쟁 이후 가장 크다고 군당국은 밝혔다. [뉴시스]

22일에 이어 23일 이틀째 남북 고위급 접촉에 나선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24일 첫 공식 일정을 황부기 차관에게 맡겼다. 오전 9시30분 찰스 랭글 미국 하원의원과의 면담이었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협상 때문이었다.

 남북 고위급 접촉에 나선 대표들은 22일 10시간 가까이 협상을 벌였고, 23일에도 마라톤 협상을 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23일 밤 11시 기자들에게 “어제에 이어 밤샘 협상이 이어질 것 같다”고 전했다. 이처럼 고위급 접촉이 길어진 것은 협상 대표들 간 담판이 아니라 각각 남측은 박근혜 대통령, 북측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리 협상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실제 현안을 논의하는 시간도 길었지만, 고비마다 북측이 정회를 요구해 협상이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정회할 때마다 북측이 수시로 평양과 의견을 조율했다”며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훈령을 직접 받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정부 당국자도 “김 위원장이 황병서를 남한으로 내려보내 협상을 하라고 했을 때는 뭐든 얻어 갖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션이 있다는 것”이라며 “그 마지노선이 바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의제도 논의되기는 하지만, 지금 북한엔 5·24 조치 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보다 방송 중단이 더 급하다”고 강조했다. 북측은 특히 확성기 방송에서 ‘최고 존엄’인 김 위원장을 흠집 내는 내용들을 언급하는 데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지난해 김정은을 희화화한 영화 ‘인터뷰’의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를 해킹한 배후로 지목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추가 대북 제재를 명시한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최고 존엄 모독’을 북한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당시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인터뷰’ 영화의 DVD를 사재기하는 북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북·중 접경지역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는 덕분에 해당 DVD의 가격이 열 배 가까이 뛰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1차 접촉과 정회=1차 접촉이 시작된 시각은 22일 오후 6시30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 등 남측 대표단은 경기도 파주 통일대교를 건너 협상 장소인 판문점 평화의 집에 먼저 도착해 북측 대표단을 맞았다. 김 실장은 밝은 표정으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황 총정치국장도 미소로 화답했다. 반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홍 장관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남북 간 장관급 이상 고위급 접촉은 2007년 11월 국방장관 회담 이후 8년 만이다. 당초 오후 6시로 예정됐던 접촉이 30분 늦게 시작된 것은 북한 평양시에 맞춘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지난 15일부터 시간을 30분 늦춘 평양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1차 접촉은 10시간 가까이 시간이 흐른 23일 새벽 4시15분에야 종료됐다. 새벽 협상을 끝낸 뒤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김관진 실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대표 4명 중 가장 젊은 홍용표 장관의 얼굴도 누렇게 떴더라. 협상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협상 내내 남북은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 문제로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한다. 남측은 북한이 도발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북측은 ‘근거 없는 날조’라는 주장으로 맞섰다는 것이다. 북측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도 집요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22일 오전 4시53분 1차 접촉 정회 사실을 발표하며 “쌍방은 최근 조성된 사태의 해결 방안과 앞으로의 남북관계 발전 방안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고 밝혔다. 전날 김규현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 상황’과 관련해 접촉하기로 했다고 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 간에 천안함 폭침,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등 ‘콜드 케이스(미제 사건)’가 계속 쌓여가고 있다. 여기에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까지 얹혀질 수 있는 상황에서 양쪽이 만났고, 남북 간 긴장 국면 완화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을 서로 제공해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23일 오전 김관진 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밤샘 협상 결과를 점검했다. 정부는 외교채널을 통해 주요 국가들과도 1차 접촉 내용을 공유했다고 한다.

유지혜·안효성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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