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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무장테러범 맨몸으로 덮쳤다, 미국인 영웅 3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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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주요 유럽 열차의 보안이 대폭 강화됐다. 무장 경찰의 순찰이 늘었고 국제선의 경우엔 짐 수색이 추가됐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향하던 탈리스 고속열차에서 발생한 테러 시도 때문이다. 승객들의 용기 덕분에 참사를 피했지만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이날 오후 5시45분쯤 파리 도착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 프랑스 승객이 화장실에 갔다가 AK-47자동소총 등으로 중무장한 모로코계 청년 아윱 엘카자니(26)와 마주쳤다. 승객은 바로 엘카자니를 덮쳤다. 총이 두세 차례 발사됐다. 그로 인해 유리창이 깨졌고 다른 승객이 총상을 입었다.

 엘카자니는 자신을 덮친 사람을 놔둔 채 객실로 이동했다. AK자동소총과 함께 반자동 권총인 루거, 칼을 가지고 있었다. 탄창도 9개였다. 당시 객실엔 여행 중이던 미 공군 소속 스펜서 스톤과 지난달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주 방위군 소속 알렉 스카라토스, 이들의 오랜 친구인 새크라멘토 주립대 4학년생 앤서니 새들러가 있었다. 스카라토스가 “가서 잡자”고 외치자 스톤이 10여m 달려가 엘카자니를 쓰러뜨렸다. 그 사이 스카라토스가 총을 뺏었다.

 무술 고수인 스톤이 테러범을 헤드록한 사이 다른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테러범을 때려 혼절시켰다. 스톤은 엘카자니가 휘두른 흉기에 목이 다치고 엄지 손가락이 거의 잘릴 뻔한 상처를 입었으나 자세를 풀지 않았다. 테러범 저지에 가세한 승객 크리스 노먼은 “총소리가 들리곤 승무원이 뛰어오더니 AK-47을 든 무장괴한이 보였다. 처음엔 자리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고 여겼다”고 했다.

 열차에선 경고음이 울렸다. 그 무렵 승객이던 프랑스 영화 배우 장 위그 앙글라드가 비상벨을 덮고 있는 유리를 깨고 작동시켰다.

 프랑스는 미국인들을 “영웅들”이라며 환호했다. 베르나르 카즈뇌브 내무장관은 “미국 승객들이 힘든 상황에서 용기를 보여줬다. 이들의 침착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끔찍한 사건을 마주했을 것”이라고 치하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들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몸을 아끼지 않고 괴한을 진압한 미군을 비롯해 승객들의 용기와 빠른 판단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반면 당사자인 스카라토스는 “그 사이 벌어진 일, 우리가 한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꿈 같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하다”라고 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비판을 받았다. 비상벨을 누른 앙글라드는 “일부 승무원이 전용실에 숨더니 문을 잠그더라.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비판했다.

 유럽은 다시 어려운 현실에 마주했다. 시리아에서 돌아온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들의 테러 우려가 현실화되어서다. 일종의 ‘역류(blowback)’ 현상이다. 엘카자니는 프랑스·벨기에 당국이 주시하는 인물이었다. 스페인 당국이 지난해 “시리아에 싸우러 갔다”고 통보해서다. ‘이슬람국가(IS)’와 연계됐다고 보고 있다. 그런 엘카자니가 브뤼셀 미디역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파리행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올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겪은 프랑스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유럽 전체론 5000여 명이 시리아로 갔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인만 1200명이다.

 한편 엘카자니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승객의 돈을 뜯어내려 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주장했다고 프랑스 일간지 르파리지앵이 23일 보도했다. 엘카자니는 자동소총 등을 자신이 노숙했던 벨기에 브뤼셀 역 인근 공원에 버려져 있던 가방에서 주웠다고 주장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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