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대화 상대는 사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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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22면

일러스트 강일구

정신과 의사를 오래하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봤다.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사람, 횡설수설하는 사람, 우울의 세계에 깊이 빠진 사람까지. 그러다 보니 타인과의 대화 능력은 좋아진 것 같다. 어떤 이가 대화하기 좋은 사람인지 감별도 하게 됐다. 그러나 살다 보면 대책 없고, 견디기 힘든 사람을 만난다. 이건 내 능력 상승과 상관없는 난공불락의 영역이다. 차라리 진료실에서 환자와 진이 빠지도록 면담하는 쪽을 택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 사람의 리스트가 늘면서 자연스레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내 개인적인 취향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먼저 그들은 나와 앉아 있는 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이라 여긴다. 나는 잘 들어주면 되는 일종의 벽이다. 그래서 비싼 밥을 사 준다고 할 때가 제일 무섭다. 시간도 샀다고 여기니 대놓고 말할 게 뻔해서다. 상대의 시간도 소중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말하고 싶은 자신이 있을 뿐이다.


두괄식으로 말하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그건 정치 문제지”, “결국 한국인의 한계라 할 수 있지”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 논리 세계가 참으로 명쾌해 또 놀란다. 그에게 세상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왜 이렇게 답이 뻔한데 남들이 고민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고개를 흔든다. 그는 모든 것을 판정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솔로몬이다. 숫자를 말해서 자신의 말에 신뢰도를 높이기를 좋아하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면 팩트가 틀릴 때가 꽤 많다. 숫자나 정보를 자의적으로 유리하게 과장하거나 줄인다.


감정을 동반한 천편일률의 논리로 세상만사를 설명한다. 정치 이슈에 대해서는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사는 국회의원, 다 썩었다”, 교육에 대해선 “대학 줄세우기와 사교육에 미친 학부모의 욕심”같이 감정을 자극해 공감을 강요한다. 최근 늘어난 레퍼토리는 강연을 많이 들으러 다닌다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책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정황은 관찰된 바 없다.


피날레는 언제나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진부한 삶의 교훈,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살만해졌으니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는 교조적 훈계, 마음에 들지 않는 제 3자에 대한 비판이나 험담이다. 결정적인 말을 하는 순간, 언제나 상대를 지그시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 때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아요”라고 맞장구를 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내 몸은 자동 반응한다. 안 그랬다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경험이 준 두려움도 한몫을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괴로움은 막상 내가 말할 때에는 자기 할 말 생각하느라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녹초가 되고 불편해진다. 그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고민해봤지만 불행하게도 부질없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고 언변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과 만남을 최대한 피하거나 짧게 끝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차선이다. 그보다는 혹시 내가 의도치 않게 저런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나 체크하고 나라도 불편하고 지루한 대화상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마음가짐 덕에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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